-
- ▲ 종이신문보기
4월 28일 월요일 10시. SKT 대리점 앞에 몇 명인지 가늠이 안 될 만큼 사람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유명 빵집 앞의 줄은 우스운 수준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큰일이라는 느낌이 왔다. 11시 30분에 그 줄에 합류했다. 처음보다는 줄어들어서 한 시간 반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유심 교체를 하고 나온 분이 교체하는 시간은 3분도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어느 분이 상황을 보고 와서 알려주기를, 번호표가 없으면 줄 서는 게 의미가 없다고 했다. 오전에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은 사람만 유심을 교체할 수 있고, 그들에게만 유효한 줄이라고. 그래서 번호표가 없는 자신은 돌아가겠다고 했다.
4월 28일 월요일 12시 30분. "우리도 줄을 섰으니 번호표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말했다. 번호표가 없는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번호표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말에 단념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탈을 막아야 했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주장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내가 말했다. 나처럼 번호표 없이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동조했다. "우리 같이 모여 있다가 말해봅시다."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계속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기로 의견을 모았다. 줄을 선 사람은 대부분 계속해서 SKT의 앱 접속을 시도했다. 유심 보호 서비스를 신청하거나 유심 교체 신청을 하기 위해서. "헉, 대기가 45만명이래요." 유심 교체 신청을 위해 접속한 분의 말이었다. "아니, 150시간 대기하라고 나오는데 150시간이면 며칠이죠?" 이런 말이 오가는 걸 들으며 줄을 서 있었다.
4월 28일 월요일 13시. "유심 칩을 교체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줄을 선 지 한 시간 반이 되었을 때, 아는 정보통신 전문가에게 전화했다. 안심 보호 서비스는 신청했는데 유심 칩도 갈아야 하느냐고. SKT에서는 안심 보호 서비스만 가입해도 유심칩을 바꾸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냐고 물었다.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전문가가 말했다.
내가 전화를 한 건 이렇게 해서 해결될까 싶은 근본적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해킹 피해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 데다 전문 지식이 없는 내가 그저 불안감을 털려고 하는 사후 처리가 아닐까 싶어서. 잘못은 내가 한 게 아닌데 왜 이런 육체적·감정적·정신적 소비를 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것 말고 할 수 있는 다른 게 있나? 여기 줄을 선 다른 사람도 모두 나 같은 마음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씁쓸해졌다.
줄이 줄어들지 않았기에 생각이 더 많아졌다. 게다가 햇살이 강했다. 양산을 쓴 사람들 말고는 모두 태양 아래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나마 한여름 땡볕이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노인들은 정말 힘들어 보였다. 육체적 부담은 물론 이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당혹감, 인터넷으로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리라는 열패감…. 그런 감정이 섞인 목소리로 노인이 말했다. "우리는 늙어서 이런 건 좀 힘들어." 늙지 않아도 힘든 건 분명했지만 늙으면 더 힘들 수밖에 없다는 걸 분명히 느낀 순간이었다. 유심을 교체해 준다는 첫날 이렇게 여기 있는 그들은 그래도 정보에서 덜 소외된 사람일 것이지만.
4월 28일 월요일 13시 반. 대리점에서 다시 번호표를 발부했다. 번호표를 우리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할 것도 없었다. 내 번호는 11번, 14시 50분에 드디어 유심 칩을 갈았다. 유심 칩을 교체하는 데 3시간 20분이 걸렸다. 버텨서 해냈다. 하지만 뭘 해냈나? 내가 유심 칩을 교체해서 얻은 이익은 없으며 겨우 현상을 유지했을 뿐이다. 겨우 현상을 유지했을지도 모른다는 미미한 안심을 얻었을 뿐이다.
4월 28일 저녁, 하루 동안 23만명이 유심 칩을 교체했다는 뉴스를 봤다. 엄청난 숫자라고 생각했는데 SKT 가입자의 1퍼센트라는 걸 듣고 이 일이 이제 시작임을 느꼈다. 유심 칩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찝찝하다. 기고자 : 한은형 소설가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582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