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신문보기

평범했던 마을이 나토 전초기지로… 전쟁이 바꿔놓았다

지난 1일 착륙하는 여객기에서 바라본 폴란드 제슈프 공항은 공군기지를 방불케 했다. 활주로 한쪽에는 미국산 '패트리엇'으로 보이는 방공 미사일 포대들이 동쪽 하늘을 겨냥해 수백m 간격으로 줄지어 있었다. 'U.S. AIR FORCE(미 공군)' 글자가 선명한 C-17 '글로브마스터3' 전략 수송기 두 대를 비롯한 군용기 10여 대가 활주로 인근 계류장을 메운 모습이었다. 수송기에서 바쁘게 화물을 내리는 군인들도 보였다. 옆자리 승객은 "우크라이나로 들어가는 군수 물자일 것"이라고 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를 오가는 항공편이 모두 끊기면서,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등 인접국을 통한 육로로만 갈 수 있다. 그 길목에 있는 도시가 폴란드 남동부의 제슈프와 프레미실, 우크라이나 르비우다. 지난 3년간 달라진 세 도시의 모습은 이 전쟁이 유럽과 세계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축도(縮圖)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슈프는 3년 전만 해도 해외에 알려지지 않은 지방 도시였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서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우크라이나 지원 물자의 집결지가 됐다.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90㎞ 정도 떨어진 이곳을 지난 3년간 거쳐간 무기와 군수품, 인도적 지원 물품은 1000억달러(약 144조원)어치 이상. 제슈프에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전초기지'란 별명이 붙었다. 뉴욕타임스는 "제슈프는 나토와 우크라를 잇는 생명선"이라고 했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서방 지도자들이 우크라이나를 방문할 때 일단 내리는 곳도 제슈프다. 나토 군인과 우크라이나 지원 인력이 몰려들면서 20만명이던 도시 인구는 한때 30만명에 육박할 만큼 늘어났다. 숙박업과 요식업이 호황을 누리자 임차료와 부동산 가격도 급등했다. 제슈프 중앙역 근처 선술집 '크리코'에서 만난 마레크(55)씨는 "큰 쇼핑몰도 새로 들어서고 동네가 천지개벽을 했다"며 "집이라도 한 채 있는 사람들은 돈을 벌었지만 서민들은 사는 게 더 팍팍해졌다"고 했다.

제슈프가 키이우로 향하는 인력과 물자의 집결지라면, 이곳에서 기차로 1시간쯤 걸리는 프레미실은 우크라이나로 넘어가는 관문이다. 전쟁 전에는 우크라이나행 열차가 도착하는 조용한 시골 국경 마을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식 광궤(廣軌)를 쓰지만 폴란드는 다른 유럽 국가와 한국처럼 표준궤를 쓴다. 프레미실은 이 두 나라 열차가 모두 들어오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이 때문에 전쟁 직후 수십만 명의 우크라이나 피란민이 일거에 밀려오면서 프레미실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난민촌'으로 변했다. 역을 비롯해 도시 곳곳에 난민 수용소가 생겨나고, 한국을 포함한 각국 봉사 단체들이 물과 식량을 나눠주고 의료 봉사도 펼쳤다. 역 맞은편 '유로페이스키 호텔'의 매니저 피오트르씨는 "몰려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식당 바닥에 모포를 깔고 임시 숙소로 내주기도 했다"고 했다. 당시 폴란드로 쏟아져 들어온 우크라이나 난민 약 600만명 중 상당수가 다시 이곳을 거쳐 돌아갔다. 지난달 29일에도 프레미실역 국제선 플랫폼에는 키이우행 열차를 타기 위해 300여 승객이 줄을 서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프레미실 일대에 머물고 있는 난민도 수만 명에 이른다. 프레미실 지역 신문 '지체에 프셰미스키에'는 "임대주택 부족과 일자리 문제, 학급 과밀 등의 문제가 커지고 있다"며 "지역사회의 다문화화(化)에 대한 불안도 크다"고 전했다.

프레미실에서 키이우행 열차를 타고 약 세 시간. 국경을 넘어 처음 도착하는 도시가 르비우다. 전쟁 전 이곳은 폴란드·독일·체코 등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던 관광 도시였다. 프리랜서 기자 비탈리(51)씨는 "전쟁과 함께 관광객의 발길은 완전히 끊겼다"며 "도시 곳곳에 피란민들의 텐트와 임시 병원, 구호 물품 창고가 들어섰다"고 했다.

이곳은 우크라이나의 '후방 수도'가 됐다. 개전 초기엔 키이우에서 떠나온 정부 기관과 외국 대사관이 이곳에 임시 사무소를 차리고, 국제 구호 단체들까지 몰려들며 항전(抗戰)의 중심지 역할도 했다. 이로 인해 심각한 주거난을 겪고 물가도 크게 올랐다. 러시아군은 전략적 중요성이 커진 이곳에 지난 3년간 200회 이상 순항·탄도미사일, 무인기(드론) 공격을 쏟아부었다. 지난해 11월에도 러시아의 대규모 공습으로 수십 명이 사망하고 기반 시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르비우에서 만난 올레나(35)씨는 "시내 코노발레츠 거리에 살다 지난해 9월 공습으로 집을 잃었다"고 했다. 그는 "열다섯 살 아들이 다니던 학교 운동장에 미사일이 떨어지면서 아침 일찍 등교했던 아들 친구들이 죽고 다쳤다"며 몸서리를 쳤다. 그는 "군인들의 장례 행렬을 거의 매일 보며 끊임없는 불안과 절망감을 느낀다. 전선에서 1000㎞ 떨어진 이곳조차 전쟁을 피해갈 수 없고, 그 암운은 유럽과 아시아로 점점 넓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픽]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 주요 일지 / 항공편 끊긴 우크라이나로 가는 길 기고자 : 키이우(우크라이나)=정철환 특파원
장르 : 연재
본문자수 : 1859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