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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사형의 순간들

    정세정 장기중 역사 교사

    발행일 : 2024.06.05 / 특집 A30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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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만6600명 처형한 혁명가… 자신도 단두대서 생 마감

    우리나라는 사형 제도를 갖고 있지만 1997년 12월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강력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사형 집행을 요구하는 여론과 반대하는 목소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요. 역사적으로도 사형당한 인물 중에는 유명인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형에 처해져 충격적인 사건들도 있고요. 오늘은 역사 속 사형의 순간들을 살펴볼게요.

    아테네 시민들,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키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정치인 클레이스테네스로 인해 발전되기 시작했어요. 그는 아테네의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는 등 민주정의 기초를 마련했어요. 이렇게 만들어진 아테네 민주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직접 민주주의'예요. 모든 국가 일에 시민 전체가 직접 참여해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 방식은 사법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됐어요.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아테네 시민들이 직접 시민 법정을 열어 판결을 내렸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 추정~399년)도 아테네의 철학자예요.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묻고 따지는 대화법 때문이었죠. 아테네의 일반 시민들에게 그의 대화 방식은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그런데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따라 하며 묻고 따지기 시작합니다. 아테네의 기성세대는 소크라테스를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기성세대를 공격하는 사람으로 만든 인물로 점차 생각하게 돼요. 그 결과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 등으로 고소당합니다.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항소한 소크라테스에게 배심원들 앞에서 변론할 기회가 주어졌어요.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배심원의 아량으로 풀려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대요. 결국 그는 감옥으로 보내졌고, 기원전 399년 사약(독당근즙)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악법도 법이다'가 아니래요. 그가 실제로 마지막에 한 말은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질병을 낫게 해주는 의술의 신)에게 내가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기억해 두었다가 갚아 주게"였대요.

    잔 다르크, 성녀에서 마녀로 몰리다

    중세 유럽에선 신앙심 깊은 여성들이 신비로운 종교적 체험을 많이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이러한 체험은 해석에 따라 마녀로 여겨지거나, 성녀로 추앙됐죠. 그런데 마녀로 몰렸다가 성녀가 되기도 했고, 성녀로 추앙받다가 하루아침에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기도 했어요. 프랑스의 전쟁 영웅 잔 다르크(1412~1431)는 후자 쪽이었어요.

    그녀가 태어난 프랑스 북동부 동레미는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1337년부터 100년 넘게 전쟁을 벌인 '백년전쟁'의 피해가 심했던 지역이에요. 어릴 때부터 신앙심이 깊었던 잔 다르크는 16세 무렵 천사의 계시를 들었어요. 대천사 미카엘 등으로부터 침략 세력 잉글랜드와 부르고뉴를 몰아내고 프랑스를 구하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해요. 잔 다르크는 계시를 받은 직후 프랑스 샤를 왕세자를 만나고자 했고, 적진을 통과해야 하는 위험한 여정을 이겨내고 왕세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왕세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가 받은 계시를 이야기했대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왕세자를 위해 기꺼이 목숨 바쳐 싸우고 프랑스를 구원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녀는 왕세자에게 받은 군사를 이끌고 오랫동안 잉글랜드에 포위돼 있던 오를레앙 지역으로 갔어요. 갑옷을 입고 병사들 앞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했는데, 그녀를 '승리의 여신'으로 여긴 프랑스 병사들은 높은 사기로 영국군을 단숨에 무찔렀습니다. 이후 랭스 지역까지 차지한 잔 다르크는 샤를 왕세자의 대관식을 추진했고, 샤를 왕세자는 샤를 7세로 프랑스 왕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이후 샤를 7세와 귀족들은 잔 다르크의 높은 인기를 시기하기 시작합니다. 그사이 잉글랜드 군대가 다시 프랑스를 공격했고 다시 전쟁터로 나간 잔 다르크는 콩피에뉴 전투에서 패하면서 부르고뉴 군대에 잡혀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부르고뉴 군대는 그녀를 잉글랜드 군대에 팔아넘기는데요. 잉글랜드군이 샤를 7세에게 잔 다르크 몸값을 요구했지만 샤를 7세는 몸값을 내주지 않았어요.

    그렇게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주도로 이루어진 일곱 번의 재판 끝에 '마녀' '이교도' '우상숭배'의 죄가 있다고 판결받습니다. 중세 기독교에서는 신의 중계자인 사제를 거치지 않고 신의 계시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잔 다르크는 끝까지 자신이 직접 받은 신의 계시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해요. 결국 그녀는 광장에서 화형을 당합니다. 샤를 7세는 1453년 백년전쟁이 끝나고 3년이 지난 후에야 잔 다르크의 마녀 혐의를 풀고 명예를 회복시켜 줬어요.

    로베스피에르, 단두대에서 죽다

    1793년 1월 루이 16세는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돼요. 주변 국가 지도자들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자기 나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프랑스를 경계한 것이죠. 이에 영국을 비롯해 에스파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만들어진 국민공회는 전쟁을 위해 병사 30만명을 동원하는 법을 통과시켰어요. 하지만 지방에서 여기에 반발하는 세력이 나타납니다. 그러자 국민공회는 이들을 '반혁명 세력'으로 보고 이들을 단속한다는 목적으로 파리와 지방에 혁명재판소를 설치해요. 1792년부터 1794년까지 이 재판소들에서 약 1만6600명이 처형됐다고 해요. 그중에서도 파리에 있던 혁명재판소가 가장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혁명재판소는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누구라도 처단하는 공포정치의 중요한 수단이었어요. 이 공포정치 시대를 이끈 인물이 바로 로베스피에르입니다. 그가 주도한 국민공회는 프랑스에 총동원령을 내렸고, 혁명군은 지방의 혁명재판소들에서 아주 간단한 재판 절차만으로 반혁명파를 처형했어요. 혐의만으로도 사형당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극심해지자 국민공회 내부에서도 '나도 로베스피에르의 손에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퍼졌어요. 그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죠. 결국 1794년 7월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와 그 측근들을 체포하기로 결의하고 그들을 모두 단두대에서 처형해요. 재판 없이 사형이 집행됐다고 합니다. 많은 이를 사형시킨 그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 거죠.
    기고자 : 정세정 장기중 역사 교사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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