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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혁 기자의 행각] 국내 최장수 만화 '열혈강호' 운명의 콤비 전극진·양재현

    정상혁 기자

    발행일 : 2024.05.18 / 주말섹션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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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죽도록 수련했다… 한국 무협 지존이 됐다

    강호(江湖)가 어지럽다. 악당이 너무 많다. 더러운 욕심으로 문파(門派)를 조직하고, 위세에 취해 법도를 유린하고, 대의를 들먹이며 착취하는 자들. 오호통재라, 쓸어버릴 방도가 없도다. 협객(俠客)이 필요하다. 보검(寶劍)은 어디 있는가. 가슴 한구석에서 뜨겁게 피 끓는 뭔가가 소리친다. 강호의 도리가 아직은 죽지 않았다고. 아직은.

    무협 만화 '열혈강호(熱血江湖)'가 연재 30주년을 맞았다. 한국 만화 115년 역사상 전무후무할 기록. 무림 패권을 놓고 정파(正派)와 사파(邪派)가 대립하는 혼란의 시대를 그린다. 1994년 5월 20일 첫 연재, 강산이 세 번 바뀌었다. 대통령이 여섯 번 바뀌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격주로 비기와 진기가 맞붙는다. 글 전극진(56), 그림 양재현(54). 두 작가는 "막걸리 마시면서 '이 더러운 세상!' 외치며 시작한 만화가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비분강개: 대결을 다짐하다

    자타 공인 현역 한국 만화의 1인자. 국내 최장수 연재(30년), 최다 단행본 발행(90권), 최다 판매 부수(600만부)는 당분간 깨지기 힘든 불세출의 기록. '열혈강호'는 사파 지존의 제자 한비광, 정파 초고수의 손녀 담화린이 함께 떠나는 무림 기행이다. 대만·중국·프랑스 등에 수출됐고, 게임으로 개발됐고, 드라마 제작이 결정됐으며, 신간이 나오면 서점 만화 부문 1위를 놓치지 않는다. 혼신을 갈아 넣었기에. 결국 연인이 된 만화 주인공 한비광·담화린처럼 한시도 서로를 떠나지 않고서. 아, 물론 두 작가 모두 각자 가정이 있다.

    ―30년, 소감이 어떠십니까.

    양재현(이하 양): "눈뜨면 그리고, 그리다 잠들고…. 하루하루의 연속이라 실감이 잘 안 나요."

    전극진(이하 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이렇게 긴 연재를 예상하셨나요?

    전: "처음엔 6개월 봤어요. 열린 결말로 끝나는 만화가 너무 흔했던 때라. '그렇게 전설은 시작됐다'로 엔딩을 맺으면 됐거든요. 다소 무책임하게 시작했죠."

    양: "만화 잡지 '영챔프' 창간호부터 실렸는데, 처음엔 표지에도 저희 이름이 안 나왔어요. 워낙 신인이기도 하고. 근데 2회부터 독자 인기투표에서 1위를 한 거예요. 끝내고 싶어도 끝낼 수 없게 된 거죠."

    최장수 종이 만화, 최근 '열혈강호'는 웹툰 형식으로 재구성돼 네이버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어느덧 웹툰의 시대가 무르익었고, 용돈 털어 만화책을 사 모으던 애독자들은 중·장년에 접어들었다. "초등학생 때 보고 울었는데 지금도 눈물이 나네" 같은 댓글이 그 증거. 만화 첫 화에 이런 광고 문구가 쓰여 있다. '오렌지처럼 다가온 무림계의 신세대, 한비광! 지금 무림계의 세대교체가 시작된다!'

    ―어떻게 시작됐나요?

    전: "객기였죠."

    양: "당시엔 반드시 피해야 하는 장르가 있었어요. 판타지, SF, 무협. 잘된 게 없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처음 준비한 만화가 '판타지+SF+무협'이었어요. 로봇이 광선검 들고 싸우는 거. 3화 분량까지 그려 갔는데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어요."

    "중요한 건 장르가 아니라 재미 아닌가? 너희가 원하는 건 다 넣어줄게. 근데 무협은 할 거야. 종로 피맛골에서 한잔 걸치면서 서로 열변을 토했죠. 자정 무렵 귀가해서 새벽 4시에 첫 스토리를 탈고했어요."

    '가제: 열혈강호'. 전씨가 짠 큰 줄기에 양씨가 만화적 연출과 개그로 양념을 쳤다. "실력을 증명하고 우리 뜻을 관철하겠다"는 각오였다. 양씨는 "얼마 전에 퇴짜 맞은 원고를 살펴보고는 경악했다"고 말했다. "출판사에서 보관하고 있었더라고요. 20대, 얼마나 치기 어린 나이예요. 잘린 이유가 있구나. 부끄러워 다 찢어버리고 싶었어요."

    ―두 분은 여지껏 안 찢어졌네요.

    양: "많이 싸워요. 마감 때문이죠. 스토리 원고가 마감 하루 남기고 넘어온 적도 있고, 전개 방식에서 견해가 다를 때도 언성이 높아지죠. 문하생들이 문밖에서 듣다가 '큰일 난 것 같은데?' 웅성거릴 정도로. 그래도 파경까지 안 가는 이유가, 집이 멀어요. 저는 은평, 형은 강남. 물리적 다툼까지는 안 가는 거죠."

    전: "음, 잘 모르겠어요." 그러자 양씨가 받아쳤다. "바로 이게 비결입니다. 별생각이 없죠."

    양: "저도 대미지는 받아요. 상처에 딱지가 앉은 거죠. 생각을 맞춰나가는 과정이 쉽지는 않아요. 그래도 목적은 같잖아요."

    좌충우돌: 두 공대생의 무협 활극

    둘 다 비(非)전공자다. 제대로 그림을 공부하거나, 스토리 작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 숭실대 전자공학과(전극진), 명지전문대 기계설계과(양재현). "공대 가면 로봇 만들 줄 알았다"고 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광팬이었다. 애니메이션 동아리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두 사내, 알고 보니 같은 사부를 모시고 있었다. 홍콩 무협 소설의 대가 진융(金龍·1924~2018)의 애독자였던 것이다. "척하면 척, 말이 너무 잘 통했다"고 했다.

    ―왜 무협에 꽂혔습니까?

    전: "종국에는 센 놈이 평정한다. 남성적인 단순 명쾌함."

    양: "싸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협(俠)'이 존재해요. 강자가 약자를 위해 무공을 써야 한다는 원칙이 있어요. 그리고 의외로 남녀평등이에요. 여자가 더 강한 경우도 많고요."

    ―평소에도 무협식으로 생각하시나요?

    양: "비즈니스 면에서 특히 그런 거 같아요. 관계자들 만날 때 무협에서 통용되는 의리? 이런 걸 고려하는 편이에요. 성향상 한곳에서 연재를 시작했으면 거기서 끝을 봐야 돼요."

    전: "무협도 종류가 여럿이에요. '과학 무협'이나 '경제 무협'도 있어요. 무협이 현실과 다를 게 없어요."

    강해지기 위해 배우는 것, 고수라면 나이 불문 스승으로 삼는 것, 이 역시 강호의 도리렷다. 양씨는 "문하생에게도 배우면서 그렸다"고 말했다. "배운 적이 없으니 그냥 감으로 그려왔죠. 인체 구조도 안 맞고, 자선도 제대로 못 긋고…. 지금 보면 죽고 싶죠. 보다 못한 문하생이 그러더라고요. '펜촉은 탄성이 좋은 일제 제브라(Zebra)를 쓰시는 게 좋습니다….' 문하생 펜 빌려다가 그렸어요."

    ―좌충우돌이었군요.

    양: "무협 만화인데 소림사(少林寺)가 안 나와요. 무협이면 소림사가 있어야 정석인데 일부러 뺐어요. 특정 시대가 배경이 되면 취재를 많이 해야 하잖아요. 건축물이든 복식이든. 그럴 시간조차 없었거든요."

    전: "반골 기질도 있었죠. 그냥 우리가 '월드'를 만들자." 한국식 무협, 만화책 판매로만 수백억 매출을 올렸다.

    ―무협 본고장에서 큰 인기라고요?

    양: “게임 덕분이에요. ‘열혈강호 온라인’이 나름 중국 1세대 롤플레잉 게임이거든요. 코로나 때 갑자기 인기가 역주행했어요. 수입이 올스톱되니까 방 안에 갇힌 사람들이 추억의 게임으로 몰려간 거예요. 초창기보다 수입이 더 커요.”

    전: “진짜 세상 일은 알 수가 없어요.”

    ―‘열혈강호’ 드라마도 곧 나오죠?

    양: “양우석 감독이 만들고 있어요. 실사(實寫)로 내년쯤 나올 것 같아요.”

    일취월장: 만화, 회사가 되다

    ‘열혈강호’는 2022년 주식회사가 됐다. 두 작가가 최대 주주, 전씨의 동생이 대표를 맡고 있다. 전 연령 대상의 무협 만화가 법인화된 건 ‘열혈강호’가 국내 최초다. 만화라는 틀을 넘어 IP(지식재산권) 자체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회사까지 차린 이유가 뭔가요?

    전: “미국이나 일본에도 서른 살 넘도록 인기 있는 만화는 흔치 않아요. ‘원피스’(1997년 연재 시작)도 ‘열혈강호’보다 어려요.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만화는요, 기본적으로 영상화에 성공했어요. 애니메이션이든 영화든, 이 영상이 통일된 하나의 ‘표준규격’으로 자리 잡아 다른 시장으로 뻗어나가는 거예요. 그 ‘표준규격’을 만들고 싶어요.”

    양: “저희는 작품에 몰입해야 하니까, 전문적으로 일해 줄 회사가 필요했죠.”

    ―다음 단계는 영상화군요.

    전: “중도 포기한 적도 있어요. 눈높이는 일본 수준에 맞춰져 있는데, 제작 기술은 아직…. 내수 TV 애니메이션 시장도 없고요. OTT 플랫폼이 생기면서 사정이 달라졌죠. 가능성이 열렸다고 봐요.”

    한국 만화의 위상은 달라졌다. 디지털 만화, 웹툰 플랫폼의 대성공 덕분이다. 만화 강국 일본에서도 위기론(論)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사업 경쟁력으로 보자면 여전히 초라하다. 시장 규모의 차이뿐 아니라, 이름만 대면 어디서든 통할 대표 상품도 전무한 탓이다. 일본 만화 ‘드래곤볼’ 한 작품이 전 세계에서 올린 매출은 약 30조원에 달한다.

    ―‘드래곤볼’ 원작자가 얼마 전 별세했죠.

    전: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각계에서 빗발치는 애도를 보면서, 저희와 동시대에 연재된 다른 나라 만화들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일본은 만화가 잘되면 바로바로 애니메이션·게임·영화로 나오는 구조예요. 만화가들은 만화만 그릴 뿐인데, 주변 산업이 계속 키워내는 거죠. 소비층이 두꺼울 수밖에요.”

    양: “이제는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첫발을 뗐다. 독특한 컬래버레이션이다. 최근 주류 브랜드 ‘화요’와 손을 잡았다. “일상생활에서도 쓸 만한 굿즈를 내놓으려고요. 즐기면서도 오타쿠 느낌을 주지 않는.” 무협의 분위기와 독자층을 고려한 것이다. “어릴 적 보던 ‘열혈강호’를 술 한잔하면서 다시 음미할 수 있는, 우리만 할 수 있는 그런 시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주화입마: 아프냐… 나도 아프다

    만화를 그린다는 건 오랜 폐관 수련이고, 차력이며, 때로는 경공술이다. 전씨는 ‘브레이커’ 등 몇 개의 웹툰 작업을 병행했으나, 양씨는 오로지 ‘열혈강호’ 하나에만 30년간 매달리고 있다. 연재 20주년 때도 서울 응암동 화실에서 두 작가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양씨는 “오른팔에 자꾸 마비가 오고 스트레스 탓에 장 계열이 다 뒤틀렸다”고, 전씨는 “근골격계 문제에 중심성망막증도 있다”고 말했다.

    ―요새 건강은 어떠세요?

    전: “계속 안 좋죠.”

    양: “하나씩 늘어요. 녹내장에, 이를 악물고 그리다 보니까 턱관절 장애도 생겼어요. 허리는 만성질환이에요.”

    연재 30년간 펑크는 10회 미만. 가장 큰 위기는 2019년에 왔다. 양씨가 말했다. “이젠 끝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분위기상 완결 짓지 않을 수 없게 제 임의로 그려버렸어요. 건강을 갖다 바쳤어요. 목 디스크가 왔어요. 상반신이 마비됐죠.”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상황. “명맥은 끊기면 안 되니 그 몸으로 분량을 줄여서라도 계속 연재했죠. 이 상태로 얼마나 더 그릴 수 있을까….” 그 뒤로도 5년이 지났다.

    ―괜찮아지셨나요?

    양: “치료받으니 나아지더라고요.”

    전: “그저 미안하고…. 올해 안에는 끝내야겠구나. 근데 깔아놓은 ‘떡밥’을 회수하려면 시간이 걸려요.”

    양: “뭐라고?”

    ‘열혈강호’에 쏟아지는 가장 잦은 비판은 줄거리가 너무 늘어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혼을 지닌 무기 ‘팔대기보’의 여덟 번째 무기가 공개된 게 연재 27년 만이었다. 초반부에 남림·북해·동령·서막 네 곳을 나눠 다스리는 절대 강자 4인의 존재가 언급되지만, 아직도 서막의 사천왕은 공개되지 않았다. “연금처럼 계속 우려먹으려는 거냐고 하시는데요, 제일 억울해요. 계속 줄이고 있거든요. 하지만 대충 끝낼 수도 없고…. 분량 조절 실패도 작가의 역량 부족이죠.”

    ―30년 지났는데, 극 중 시간은 얼마나 흘렀나요?

    전: “1년 6개월요.”

    양: “등장인물이 워낙 많으니….”

    ―독자들 반응은요?

    양: “저는 말 하나하나가 심장에 박히는 타입이에요. 공황장애까지 겪었다니까요. 베트남 팬들이 제일 뜨거워요. 제 페이스북에도 한글로 글을 남겨요. ‘당신의 연재가 늦기 때문에 도끼를 들고 찾아가서 죽일 것입니다.’”

    전: “공항 세관도 알아보시더라고요. 소셜미디어는 정신 건강을 위해 일절 보지 않습니다.”

    화룡점정: 용두사미가 될 수는 없다

    무림의 결전은 이제 결말로 치닫고 있다. 전설로 기록될지, 맥 빠지는 졸작으로 주저앉을지 기로에 서 있다. 처음엔 대작(大作)의 냄새를 풍기다 10년 가까이 연재되며 종국엔 부려놓은 스토리를 다 주워 담지 못한 채 부랴부랴 셔터를 내린 한국 만화(웹툰)가 최근 적지 않았다. 작품명을 거론할 수도 있으나, 참기로 한다.

    ―용두사미가 많았습니다.

    전: “대부분 지쳐서 그래요. 저희는 지친 단계를 넘어서 거의 의식만 남아 있는 상태죠. 일단은 건강해야 할 것 같아요. 몸이 처지면 포기하고 싶어지거든요.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거예요. 제 첫 독자 재현이가 워낙 똑똑하니까.”

    양: “절대 이상하게는 안 끝낼 거예요. 제 젊은 날이 부정당할 것 같아서요. 극진이 형한테 바라는 점은, 요즘 사람들의 호흡을 익히자. 조금 빠르게.”

    ―아무래도 웹툰과는 속도가 다르죠?

    전: “웹툰은 위에서 주르륵 내리는 식이라면, 출판 만화는 ‘장면 전환’이에요. 페이지 넘어가면 첫 장면에서 ‘쿠쿵!’ 이런 게 있어야 돼요.”

    양: “그래도 웹툰처럼 바꿀 생각은 전혀 없어요. 지금도 연재하고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예전 만화’니까요.”

    ―예전 만화요?

    양: “종이 잡지로 시작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웹툰과 경쟁해야 한다면 신작으로 할 거예요. 새 스토리와 연출로. 괜히 ‘요즘 만화’처럼 뜯어고쳤다가는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아요. 바꾸지 않아 나중에 잊힌다면 잊힐 만한 작품이었기 때문이겠죠.”

    열혈, 화끈하게 끝내주는 한 방을 꿈꿨다. 그러나 강호는 비정하다. 평가는 냉정할 것이다. 다른 삶의 기회가 있었다. 연재 시작을 앞두고 현대전자(SK하이닉스) 취업 합격 소식을 들은 전씨가 양씨에게 전화했을 때처럼. “어떻게 하지?” “당장 그만둬! 나랑 한 약속이 장난인 줄 알아?” 사실상 하나의 존재로 살아왔다. 의사는 직업을 바꾸라고 권고했다. 그래도 매달린다.

    ―이 길을 후회한 적 있으세요?

    “아뇨.”

    ―그럼 차기작도 함께하실 건가요?

    “아뇨!”
    기고자 : 정상혁 기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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