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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서 몰린 기자·방청객… 밤샘 줄서기 알바도

    윤주헌 특파원

    발행일 : 2024.05.18 / 국제 A12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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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 '세기의 재판' 윤주헌 특파원 참관기

    "당신은 8번입니다." 16일 자정을 막 넘긴 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 형사법원 앞엔 1인용 텐트가 늘어서 있었다. 성인 남성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법한 텐트 안에 앉아 있던 흑인 남성이 검은 노트에 내 이름과 소속 회사를 적으며 말했다. 검은 안대로 왼쪽 눈을 가린 그의 이름은 짐(Jim)이라고 했다. 행색을 보니 공무원은 아닌 것 같아 "뉴욕시나 법원 관계자인가요"라고 물으니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줄 대신 서주고 돈 받는 업체에서 나왔수다."

    이곳은 지난 한 달 동안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의 눈이 쏠리는 '세기의 재판' 법정 앞이다. 한 주에 서너 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이른바 '성 추문 입막음' 혐의와 관련한 형사재판이 열리고 있다. 오는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 바이든 대통령과 박빙의 승부를 이어 가는 트럼프가 성인물 배우와의 관계를 은폐하기 위해 돈을 준 사건과 관련한 혐의로 지난달부터 재판을 받고 있다. 미국 역사상 전현직 대통령을 통틀어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는 것은 트럼프가 처음이다.

    재판의 특수성과 폭발적 관심에 비해 선착순으로 배정되는 법원 좌석 수는 몇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역사적 현장에 동참하려 미 전역에서 몰려온 이들이 밤새 줄을 서가며 재판 방청을 노리는 '오픈런'이 벌어지는 상황이다. 직접 줄을 서지 못하는 이들은 줄 서기 '아르바이트'를 동원하기도 한다. 재판은 동영상 촬영·방영이 금지되기 때문에 현장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분위기를 느끼려면 '그곳'에 있는 방법 외엔 없다.

    이날 재판은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한다고 예고됐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자정 좀 지나 도착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이미 텐트 넷이 세워져 있었고 접이식 의자에 비 맞고 앉은 이도 여럿 보였다. 뉴욕 퀸스 자메이카에 사는 '샌드라'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이번 주 내내 트럼프 재판 줄을 대신 서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법원 앞 줄 서기의 '공임(工賃)'엔 시장 논리가 적용된다. 보통 4시간에 100달러를 받는다고 하는데, 이날처럼 비가 오거나 밤샘을 불사해야 하는 날엔 추가 요금이 붙는다.

    오전 3시쯤, 간이 의자에서 뒤척이던 한 여성이 구토를 한 후 철수했다. "너무 추워서 못 버티겠다"고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날 오전 5시 30분, 버지니아주(州)에서 고등학생 딸과 함께 왔다는 마르다라는 여성이 일반인 줄 앞쪽으로 가서 줄 서기 용역 직원과 자리를 바꿨다. 그는 "업체에 딸과 합쳐 총 480달러를 냈다. 트럼프 지지자는 아니지만, 역사적인 재판을 직접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재판이 열리는 날이면 100명이 자리싸움을 벌이며 줄을 선다"고 했다.

    나도 월마트에서 산 간이 의자를 가져 갔다. 하지만 오전 4시쯤부터는 서 있기로 했다. 쪼그리고 앉다 보니 허리가 아파온 탓이다. 서서 몸을 움직이는 편이 추위를 이기기엔 나았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어느덧 오전 6시, 법원 경비 여럿이 나타나 줄 선 사람들 수를 세기 시작했다. 어느새 비가 그친 오전 6시 30분쯤 자리의 '진짜 주인'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커피를 들고 온 뉴욕타임스 기자 셋도 대행업체 직원들과 자리를 바꿨다.

    오전 8시를 좀 넘어서 법원 직원이 줄 선 이들에게 노란 종이를 나눠 줬다. 법원 문양 및 날짜와 함께 영어로 '뉴욕 스테이트 통합 법원 시스템'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천국 가는 표라도 받은 듯 환히 웃었고 오전 8시 30분쯤 줄지어 법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들이 잇달아 "환영한다(Welcome)"고 말을 건넸다. 보안 검색대를 두 번 통과한 후 15층 법정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았다.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길바닥 간이 의자에 의존했던 몸에는 그 어느 소파보다 안락하게 느껴졌다.
    기고자 : 윤주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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