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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의 외교 프리즘] '러시아 포비아' 버려야 푸틴에게 무시당하지 않는다

    이하원 외교담당 에디터

    발행일 : 2024.04.03 / 여론/독자 A2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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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8일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산하 전문가 패널의 임기 연장 결의안이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된 것은 러시아와 북한이 '형제 국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뉴욕타임스는 대북 제재 전문가 패널 무력화가 러·북 관계와 북한 핵 문제의 새로운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신문은 "지난 10년 동안 미국과 러시아 간 공통의 명분을 가진 프로젝트가 북한의 핵무기 확대를 막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마저도 무너졌다"고 했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는 유엔 대북 제재 체제를 약화시키려는 조직적인 노력의 세 번째 단계"라고 했다.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 이행 중단(1단계), 북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에 대응한 신규 안보리 제재 결의 저지(2단계)에 이어 대북 제재 체제의 영구적 해체 조치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곤란한 상황이 되자 북한에 무기 지원을 받으려고 노골적으로 북한 편을 들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1950년 6·25전쟁 이후 북한과 최고 수준의 밀착을 하면서 여러 시그널을 냈지만, 우리 정부는 이를 외교·안보의 최우선 순위로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해 김정은이 러시아의 우주기지를 방문, 푸틴과 정상회담도 했지만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우리의 '레드라인'은 조금씩 후퇴해 왔다.

    러시아의 라브로프 외무 장관은 지난해 11월 북·러 무기 거래로 유엔 대북 제재를 위반한다는 비판에 대해 "유엔 안보리가 제재한 것"이라며 "항의는 안보리에 하라"고 비(非)논리적 발언을 했다. 자신들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10차례 이상 대북 제재 결의안에 찬성한 것을 앞으로 기억하지 않겠다는 발언이었다.

    올 초 주한 러시아 대사가 한 인터뷰에서 한국을 '비우호국', 북한은 '우호국'으로 불렀다. 그는 "한국이 러시아의 비우호국 중 우호국으로 되돌아가는 첫 사례가 되길 희망한다"고 했다. 사실상 협박으로 주재국 대사로서는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는 한국 선교사를 수교 이후 처음으로 '간첩' 혐의가 있다며 억류했다. 북·러 양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2월까지 6개월간 컨테이너 6700개, 9000개 분량의 포탄과 물자 교환을 한 사실도 공개됐다.

    특히 지난 2월 러시아 외교부의 여성 대변인이 윤석열 대통령의 북한 비판 발언에 대해 "혐오스럽다"고 논평한 것은 묵과해서는 안 되는 사안이었다. 러시아는 "북한 정권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한 비이성적 집단"이라는 윤 대통령 발언이 "노골적으로 편향됐다"고 반발했다. 이는 러시아 차관의 방한 도중 러시아 언론 보도로 알려졌는데, 푸틴 대통령의 지시나 묵인이 없었다면 나올 수 있었을까. 모스크바를 찾은 최선희 북 외무상에게 방북을 약속한 푸틴이 김정은을 위해 '대리 항의'했다는 느낌이 드는 논평이었다.

    윤 대통령의 북한 비판에 대해 러시아가 일개 외교부 대변인을 내세워 반박한 것은 단순한 외교 결례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 북한이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함께하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이었다. 앞으로 더 강화된 북·러 군사 협력으로 한반도를 위험하게 할 수도 있다는 시그널로 봐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좀 과격한 발언을 하는 여성 외교관인데, 무시해도 좋다. 러시아와는 물밑으로 서로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며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결국, 러시아가 유엔 대북 제재 패널을 무력화하면서 러·북 관계는 한 단계 더 도약했다. 이 사안이 워낙 심각하다 보니 우리 정부도 2일 이례적으로 맞대응에 나서 북한과 러시아 간 군수물자 운송에 관여한 러시아 선박 2척과 북한 노동자 송출에 관여한 러시아 기관 2곳, 개인 2명을 독자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외교부의 소극적인 대러시아 대응 배경에는 '러시아 포비아(공포증)'가 존재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두 명의 외교부 장관이 러시아와의 외교 문제로 경질됐다. 1998년 박정수 외교부 장관은 한·러 스파이 맞추방 사건의 여파로 교체됐다. 이정빈 장관은 2001년 한·러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미국이 폐기를 주장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 조약의 유지·강화 문구가 포함돼 사임해야 했다. 한·러 갈등으로 러시아 담당 국장이 전격 경질당한 일도 있었다. 이러다 보니 러시아에 대해서는 가급적 업무를 기피하거나 맞부딪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최근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이 한 칼럼에서 "러시아와 북한 간 밀착이 가시화되면서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며 "이제 대러시아 정책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급 자제 방침을 전면 재검토할 때가 됐다"고 했다. 그러자 주러시아 한국 대사관에 근무했던 '모스크바 스쿨'의 전직 외교관들에게서 비판이 나왔다. A씨는 "천 전 수석의 말은 그럴듯하지만, 과연 그런 네거티브 어프로치가 러시아에 성공할 것 같으냐"고 했다. B씨는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면서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틈만 나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한다. 그런 국가를 함부로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젤렌스키가 초보 정치인으로서 러시아를 자극하는 외교 정책을 펴서 두 나라가 충돌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 불개입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이 같은 입장은 주권국가가 해야 할 일을 제때 결연히 하지 않으면 노예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국제사회라는 것을 도외시한 것이다. 최근 러시아와 북한의 급속한 밀착은 '러시아 포비아'를 떨쳐내고, 한·러 관계의 근본을 다시 살펴보며 재정의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러시아가 매일같이 미사일을 쏘며 도발하는 북한 편을 들겠다고 노골적으로 나오는 이상 좋은 게 좋다는 식의 기존의 대러 정책에는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이용준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러시아가 북한과 노골적으로 무기를 거래하고, 모든 외교 사안에서 북한 편을 드는데 우리가 외교 중립을 지킬 이유가 없다"며 "주권국가 관계에서는 상호주의가 중요한 덕목인 만큼, 러시아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푸틴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 러시아·북한의 외교관계
    기고자 : 이하원 외교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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