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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의 선구자들] (8) 과학 행정가 최형섭

    민태기 공학 박사·'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저자

    발행일 : 2024.04.03 / 여론/독자 A28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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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초대 소장·과기처 장관만 7년 7개월… 한국 과학을 이끌었다

    1945년 12월 경남 진주의 최형섭은 서울에 출장 갔다가 와세다 동문에게 경성대학 이공학부 얘기를 듣는다. 1920년 진주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충청도 여러 곳 군수를 지내며 대전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아들이 법대에 진학하길 원했지만, 최형섭은 공대를 고집해 1939년 와세다대학 채광야금학과에 진학한다. 졸업 후 진주에서 아버지의 견직 회사에 근무하던 최형섭은 경성제국대학이 해방 후 이름을 바꾼 경성대학 교원이 부족하다는 사정을 들은 것이다. 새 나라는 무엇보다 이공계 인력 양성이 시급하다는 동문의 호소에 경성대학 이공학부 강사로 합류한다.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 계획안(국대안)으로 경성대학은 격동에 휩싸인다. 경성대학 이공학부장 이태규가 사태 해결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대학은 혼란에 빠졌고, 최형섭은 진주에서 쉬다가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어수선한 정국에 고심하던 그는 미국 유학을 준비한다. 퍼듀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출국하기 보름 전 6·25전쟁이 일어나 고향 진주 인근 사천 공군에 입대한다. 그런데 이게 오히려 전환점이 되었다. 항공공학자로 유명한 장극 박사와 인연이 닿은 것이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중퇴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난 장극은 1938년 베를린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아인슈타인을 배출한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옮겨 1948년 노터데임대학에서 항공공학 박사가 되었다. 그의 큰형은 장면 총리, 둘째 형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대 학장 장발이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장극 박사는 귀국해서 공군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미국 노터데임대학 최초 한국인 박사였던 장 박사의 추천으로 최형섭은 노터데임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최형섭은 노터데임에서 석사를, 이어 1958년 미네소타에서 금속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귀국한 그가 과학 행정가로 주목받게 된 계기는 원자력연구소였다. 일본을 무너뜨린 원자력 기술은 한국 과학자 모두가 열정적으로 참여하던 분야였다. 이태규, 이승기와 함께 교토제국대학 3인방이라던 박철재 박사가 1959년 출범한 원자력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한다. 이 무렵 금속공학자 최형섭 역시 원자력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4·19와 5·16 등으로 원자력연구소 역시 어려움을 겪었다.

    새롭게 집권한 군사정부는 금속공학자 최형섭에게 대한중석의 자문을 부탁한다. 중석(重石)은 텅스텐을 말한다. 세계 최대 텅스텐 광산을 가지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대한중석은 한때 수출의 60%를 담당하기도 했지만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경제 감각도 있던 최형섭은 대한중석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찾아내고, 기술을 개발한다. 이렇게 방향을 잡은 대한중석은 예편한 박태준(나중에 포항제철 사장)이 사장으로 부임하며 흑자로 전환했다. 군부의 신뢰를 쌓은 최형섭은 1962년 4월 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된다. 그는 탁월한 행정 능력을 보이며 연구소를 정상화했다.

    최형섭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대한민국이 가진 것은 인력뿐"이라는 생각이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이렇게 추진된 것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였고, 최형섭은 1966년 2월 설립한 KIST의 초대 소장으로 부임한다. 과학자의 역할이 연구 활동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그는 과학기술 정책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렇게 '장기 에너지 수급 계획(1967)' '기계공업 근대화의 기본 방향(1969)' '종합 제철 공장 건설을 위한 타당성 조사(1969~1975)' 등이 이뤄지며 대한민국 경제의 기반을 만들었다.

    1971년 6월 최형섭은 과학기술처 장관이 되었다. 이공계 인력 양성이 과학 발전의 핵심이라고 본 그는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는 미국 스탠퍼드대학 터먼 교수와 친분을 쌓았다. 터먼이 한국을 방문해 만든 인력 양성 계획서로 한국과학원(현 카이스트)이 탄생한 것이 이 무렵으로, 최형섭은 설립 초기 큰 역할을 했다. 한국과학재단(현 연구재단)을 만들고, 대덕연구단지를 조성했다.

    최형섭은 1978년 12월까지 약 7년 7개월 동안 과학기술처 장관직을 맡았는데,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장수 국무위원이다. 5년 단임제인 현행 헌법이 계속되는 한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최형섭은 이렇게 회고했다. "과학기술 개발은 일관성 있게 꾸준히 추진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는데 이를 실천한 사람은 박 대통령이다. 나는 과학자로서 전공을 살리지 못했지만, 한국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그런 의지를 가진 대통령을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최형섭은 당시로는 생소했던 기술 투자를 수행할 국책 금융회사를 고민했다. 실리콘밸리와 같은 혁신 연구 생태계의 원동력이 벤처 투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양성된 이공계 인력들이 기술 스타트업으로 꿈을 펼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앞장선다. 이렇게 1981년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현 KTB)가 출범하며 나중에 대한민국의 벤처 열풍을 이끌게 된다.

    최형섭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한국과학원 원장,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된 과학 발전은 그의 리더십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4년 작고한 그는 이태규에 이어 국립묘지에 안장된 두 번째 과학기술자이며, 과학기술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아버지는 일제 중추원 참의, 아들은 '과학 한국' 선구자… '기구한 가족史']

    1907년 고종의 강제 폐위는 군대 해산으로 이어졌다. 해산 명령에 박승환의 자결을 시작으로 군인들이 봉기하며 각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이 정미의병의 시작이다. 그런데 경남 진주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진주의 하급 경찰이던 25세 최지환은 단신으로 진주 군영으로 들어가 봉기를 준비하던 지휘관을 감금한다. 진주 봉기는 이렇게 허무하게 진압되고, 최지환은 이 공로로 일본 훈장을 받으며 충북 음성, 영동, 충주 등의 군수를 역임하고, 평안도 참여관을 거쳐 중추원 참의까지 오른다. 최지환의 아들이 최형섭이다.

    최지환은 사업 수완도 뛰어나 고향 진주에서 권번(기생 조합)을 만들기도 하고, 일본인들과 견직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의 일본식 이름을 후지야마(富士山) 다카모리(隆盛)라고 짓는다. 일본의 상징인 후지산(富士山)과 메이지 유신을 이끌고 정한론으로 유명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이름을 합친 것이다. 1949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얼마 뒤 보석으로 풀려났으며, 이듬해 6월 대법원에서 최종심이 진행 중이었으나 6·25전쟁으로 흐지부지되었다.

    최형섭 박사는 아버지에 대해 언급한 적이 거의 없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연좌제는 이미 사라졌고, 본인 의지나 책임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했는지와 상관없이 지금 6자 회담이라는 좋은 일, 평화 프로젝트를 위해 힘쓰고 있는데 재를 뿌리면 되겠느냐." 2008년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으로 6자 회담을 위해 활동하던 성 김에 대해 한 말이다. 성 김의 아버지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다.
    기고자 : 민태기 공학 박사·'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저자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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