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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직 소방관 위한 서울 '소방의 길'

"지금쯤 살아있으면 누군가의 아버지, 남편으로 저마다 자리에서 빛났을 당신들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국민의 목숨을 위해 뜨거운 화마와 싸우다 희생한 당신들이야말로 국민의 영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4일 오후 서울 은평구 진관동 서울소방학교. 23년 전 이날 홍제동 2층 주택 화재 현장에서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순직한 당시 서부소방서(현 서대문소방서) 소속 소방관 6명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렸다. 고(故) 박동규(당시 45세) 소방위, 김기석(42세)·김철홍(36세)·박상옥(33세) 소방장, 장석찬(35세)·박준우(31세) 소방교가 그 주인공이다. 유족 대표 김미순(70·김철홍 소방장의 누나)씨가 추도문을 읽어 내려가자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자녀는 어느새 성인이 됐고, 함께 현장을 누비던 동료들은 이미 중년이 됐다. 장석찬 소방교의 아내 천순자(56)씨는 "4년 전 아들이 갑자기 아버지의 구조복을 입고 나타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며 "얼마나 아버지가 보고 싶었으면 옷장 깊숙이 넣어둔 걸 꺼내 입었을까 싶어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했다. 김기석 소방장의 아내 조복수(62)씨는 "생전 '나는 죽으면 현충원을 가는 사람'이라고 하더니 진짜 그렇게 빨리 가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고, 아들(26)은 "아버지 없이 자란 것이 서러웠지만, 크면서 아버지가 영웅이라는 사실이 늘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같은 소방서에서 근무한 동료 이성촌(57) 소방위는 "당시 삽과 곡괭이만 들고 콘크리트 더미를 파헤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요즘처럼 신식 장비가 있었으면 모두 살았을 것 같다"며 "그들은 장비는 물론 동료들에게 많은 것을 주고 떠났다"고 했다.

이날 서대문구 홍제역 3번 출구에서 고은초등학교까지 382m가 '소방영웅길'로 지정됐다. 행사에 참석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앞으로 '소방영웅길'을 지나는 수많은 이들이 여섯 소방영웅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유족들은 도로를 걸으며 순직 소방관들의 얼굴을 그린 현수막을 어루만졌다. 한 유족은 "재개발되거나 해서 길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2021년 경기 평택의 '소방관 이병곤길', 지난해 울산의 '소방관 노명래길'에 이어 세 번째다.

홍제동 주택 화재 사건은 2001년 3월 4일 새벽 서대문구 홍제동 2층 주택에서 발생했다. 당시 소방관 46명이 출동했지만 다른 차들 때문에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해 소방관들이 소방 호스를 끌고 150여 m를 달려야 했다. 소방관들은 불길 속에서 집주인과 세입자 가족 등 7명을 구출했다.

그런데 집주인이 "아들이 안에 있다"고 고함 쳤다. 소방관들은 다시 불 속으로 뛰어들어 로프로 서로 몸을 묶은 채 뜨거운 바닥을 더듬었다. 장비라고는 공기호흡기와 손도끼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전체가 무너졌고, 소방관 6명은 잿더미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런 뒤에도 소방관들은 집주인 아들을 찾느라 한참을 더 수색했다. 이날 수색은 집주인 아들이 친척 집에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뒤 끝났다. 그 아들이 불을 지른 방화범이었다.

이 사건은 소방관 6명이 한꺼번에 순직한 소방 역사상 최악 참사였다.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겼고, 합동 분향소에는 사흘 동안 3만여 명이 찾아 애도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조문했다. 순직 소방관들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소방관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도 됐다. 값싼 방수복(비옷)을 입고 불 속에 들어가던 소방관들에게 방화복이 지급됐다. 당시 방수복은 한 벌에 8만원이었지만, 방화복은 15배인 120만원이었다고 한다. 김철홍 소방장의 형 재홍(62)씨는 "불을 막는 옷이 아니라 물을 막는 옷을 입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 아니냐"며 "방수복을 입고 숨진 모습을 보고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고 말했다.

이듬해(2002년) 군 복무를 대체하는 '의무소방대'도 창설됐다. 인력 부족이 사고를 키웠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근무시간도 24시간 맞교대 근무에서 3교대로 바뀌었다. 당시 소방관 1명이 보호해야 할 시민은 2000명이었는데, 지금은 770명 수준으로 줄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홍제동 화재는 소방 도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만들었고, 이후 단속도 강화됐다. 이후 소방차 길을 터주는 시민들 의식도 크게 좋아졌다"고 했다.

소방청은 올해부터 순직 소방관을 기리는 추모 대회인 '119메모리얼데이'를 매년 열기로 했다. 그동안 소방청 내부적으로만 해온 추모 행사를 범국민적 행사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래픽] 2001년 홍제동 주택가 화재가 불러온 변화 기고자 : 안준현 기자 박진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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