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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軍 피해 폴란드까지 3500㎞… 열흘간 죽어라 달렸죠＂

"저에게 가장 소중한 건 할아버지, 할머니와 친척들이에요. 소중한 가족들이 모두 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게 가장 아쉬워요."

가족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갈 때 18세 소녀 김까짜는 쏟아내리는 눈물을 참으려는 듯 연신 눈동자를 위로 향했다. '한국으로 피란 오면서 가장 소중하게 챙겨 나온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스마트폰"이라 답하며 해맑게 웃더니, 가족들 얘기에 이내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부(代父)님이 계시는데 군대에 징집된 이후 행방불명돼 연락이 안 되고 있다"며 "가족과 친척들도 대부님이 어디 갔는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고 한다. 그가 꼭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 15일 경기도 안산시의 고려인 지원 연대 '알이랑'에 모인 우크라이나 출신 고려인 청소년들은 또래의 순수함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전쟁의 상처와 고단함에 지친 모습이었다. 이들은 모두 2년 전 러시아가 퍼부은 폭격을 간신히 버티다 고려인이란 신분 덕에 우크라이나를 빠져나온 이들이다. 어느새 피란 생활만 1년 6개월을 넘어선 이들을 한자리에서 만났다.

이들은 또래 여느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노는 것이 즐거운 나이지만, 전쟁의 기억으로 어딘가 굳어 있는 듯했다.

하루아침에 정든 집을 떠났던 순간이 기억에 생생하다. 부모님과 함께 우크라이나 동부 침략지 헤르손에서 한국으로 온 쌍둥이 자매 김야나·아냐(17)는 "소중한 그림들을 방에 두고 왔는데 이제는 러시아 군인들이 우리 집에 들어와 다 뺏어 갔다" "친구들에게 선물 받은 책을 두고 온 것이 아쉽다"고 했다. 할머니와 함께 급히 한국행을 택해야 했던 고려인 혈통의 드미트리 니샤노프(18)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할머니와 온 게 다행일 뿐"이라며 "우크라이나에는 나쁜 추억만 남겨두고 왔다"고 했다. 가족들 얘기에 일순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아이들은 남겨진 가족들과 친척·친구들이 눈에 밟힌다고 했다.

너무나 급박한 피란길이었다. 많은 우크라이나인은 이웃 나라 폴란드를 통해 독일과 캐나다로 빠져나갔다. 독일·캐나다 등은 우크라이나 전쟁 피란민을 특별 난민 지위로 인정해 정착할 수 있게 도왔다. 한국이 뿌리인 이들은 한국행을 택했다. 당시 누군가에겐 피란을 떠나는 것마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려인 3세·4세인 아이들이 출생한 사정은 저마다 달랐지만 이들의 부모는 당연하게 한국을 행선지로 삼았다고 한다. 아이들의 지푸라기는 한국이었다. 이들의 입국을 도운 알이랑 김종홍 대표는 "고려인들은 생김새나 문화를 이유로 다른 유럽 국가로 가는 것보다는 한국행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한국은 난민 지위를 인정하지 않지만, 성인에 한해서 동포 비자로 일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한국으로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국행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일단 폴란드까지 가는 길조차 쉽지 않았다. 부모님, 동생들과 한국행을 결심한 로마 길디셰(18)와 아냐·야나 가족이 그랬다. 길디셰는 "(우크라이나 동쪽) 헤르손이 고향인데 헤르손이 점령되면서 우크라이나 서쪽으론 나갈 수가 없고,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남쪽의 크림반도를 통해 러시아 영토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저 너머 자유를 향해 자국을 침공한 동북쪽의 러시아 땅으로 먼저 들어갔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 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로 이동하니 어느 곳에서도 환영하지 않았다. 어서 러시아를 통과하자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4일을 달렸다"고 했다. 이들 가족은 자국 영토와 친러 국가인 벨라루스 영토가 멀리 내다보이는 지역을 포함해 서북쪽을 향해 내달려 러시아를 통과했다. 이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거쳐 폴란드로 향하는 총 열흘간의 3500㎞ 여정을 이어갔다. 자동차 한 대에서 먹고 자고 쉬는 나날이었다. 한국행 비행기에서 모두가 곯아떨어졌다.

어렵사리 도착한 한국이지만, 쉽지 않은 생활이 가득했다. 이들은 거의 한국말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대신 우크라이나에서 다니던 학교의 원격 수업을 듣고 있다. 오데사에서 부모님·동생과 한국으로 피란 온 박나스자(14)는 "우크라이나 시간에 맞춰 온라인 수업을 듣다 보니 지금까지도 밤낮 바뀐 생활을 하고 있다"며 "지금은 방학이지만 시차 적응이 안 돼 햇빛을 보는 게 익숙지 않다"고 했다. 이들이 살던 곳은 우크라이나이기에, 길어지는 전쟁은 고통이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생활고는 더 커졌다. 니샤노프는 "남은 가족을 루마니아에 두고 할머니와 한국에 올 때는 내가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루마니아로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며 "그러나 한국에 와보니 비자 등의 문제로 일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빨리 한국말을 배우면서 어른이 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가족 내 성인 한두 명이 일용직 등으로 일하며 노인과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학교도 가지 못하는데 부모도 곁에 없는 시간이 많다. 김종홍 대표는 "생활고도 문제지만 아이들이 겉도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우리 모두가 손잡고 이 아이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 우크라이나 쌍둥이 자매 가족의 탈출 경로 기고자 : 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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