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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주 감귤 농장에 갔다. 넓은 챙 모자를 쓰고 귤 따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이 귤 따도 돼요?" 물었더니 '콩 비에'라는 말이 들려왔다. 제주 방언이 이렇게나 알아듣기 어려운가? 놀라서 다시 아주머니 얼굴을 봤는데 한국인이 아닌 듯했다. 그 농장엔 감귤 수확 철을 맞아 베트남, 필리핀 등 다양한 출신의 '해외 이모'들이 일하고 있었다. 농장을 나온 뒤론 길가에 붙은 '외국인 일손 구함' '이주 노동자 구인'이라는 광고판에 눈길이 갔다.

필리핀은 해외이주노동자부(DMW)라는 행정 부처를 따로 두고 있다. 그런데 지난달 11일 이 부처가 한국으로 계절노동자 파견하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해외이주노동자부 장관이 서명하고 필리핀 행안부 장관이 발표한 이 행정명령엔 '한국 대사관, 출입국관리국, 외교부의 고위급 협의 결과 계절근로자 고용과 배치를 유예할 것이다' '계절근로자의 권리 보호를 강화하기 위함이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작년 전남 지역에서 농가와 외국인들을 중개하는 불법 브로커들이 계절근로자의 임금을 떼어가고, 폭언이나 폭행 사건이 잇따라 발생한 탓이었다.

행정명령이 나온 지 한 달, 법무부와 고용노동부가 필리핀 정부를 설득하고 있지만 해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해외이주노동자부와 실태조사위를 꾸린 국내 관계자는 "필리핀에서는 근로자와 농가 사이 불법 브로커가 개입할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 모니터링 강화 요구를 하고 있고, 국내서도 논의 중이다"라고 했다. 지난 7일에는 기존 내용에 쐐기를 박는 두 번째 행정명령이 발표됐다. '2월 1일 이전에 비자를 받거나, 심사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출국을 불허한다' '근로 계약서에 불법 수수료를 징수하지 않는다는 요건이 있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는 조건이 담겨있었다.

해마다 필리핀은 베트남과 엎치락뒤치락하며 한국의 계절근로자 참여국 1, 2위를 하고 있다. 당장 필리핀 계절근로자가 없으면 봄철 파종에 차질을 빚을 농가가 많다. 농어촌 일손을 도우려 마련된 계절근로자 제도는 2015년 충북 괴산에서 처음 시작해 전국으로 확대됐다. E-8(계절근로) 비자로 입국한 이들은 농어촌에 배정돼 일하며 5개월간 체류할 수 있다. 각 지자체가 희망하는 계절근로자 수를 신청하면 법무부가 배정심사협의회를 통해 규모를 확정한다.

외국인 계절근로자를 국내로 불러들이는 주체는 농어촌 지자체다. 필리핀 계절근로자의 발길이 끊겼는데 이 지자체들은 '펑크 난 필리핀 노동자 몽골·태국에서 채운다' '필리핀 송출 중단 문제없어'라는 홍보 자료를 내놓고 있다. 계약상 을의 위치에 있는 나라가 이례적으로 인력 수급을 중단하겠다는 특단의 조치까지 내렸는데도, 대책 홍보에 급급할 뿐 개선의 의지를 보이는 지자체는 없었다.

아마 제주 감귤 농장에서 만난 이모는 베트남에서 온 것 같다. '콩 비에'로 들린 말의 정체는 베트남어로 '난 몰라요'였다. 외국인 출입국을 담당하는 법무부도, 계절근로자를 불러들이는 지자체도 '나는 몰라요'식이다. 그럼 농가들은 누가 도울까. 그다음 인력 송출을 중단하겠다는 나라가 베트남, 캄보디아일 수도 있다. 기고자 : 신지인 사회부 기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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