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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40) 독자 보물로 본 1950년대

    채민기 기자

    발행일 : 2024.02.13 / 문화 A16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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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부산 피란 학교서 찍은 사진… "싸우는 이 마당에도 우리는 배워요"

    독자들의 보물에 새겨진 대한민국 현대사를 연대별로 돌아본다. 첫 순서인 1950년대는 6·25전쟁의 참화가 온 나라를 덮친 시대였다. 그러나 앞서 농지개혁을 단행해 자유 시장경제의 기틀을 마련했고, 전쟁과 전후 복구 과정에서도 아이들은 배움을 이어가며 장차 나라를 일으킬 실력을 쌓았다. 신생 대한민국을 세계 무대에 알리려는 노력도 있었다.

    신원 확인이 중요했던 혼란기

    6·25전쟁 시기에 발행된 신분 증명서들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주민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안성구(68) 연세대 원주의과대 피부과 명예교수의 모친 윤기호씨가 1951년 10월 8일에 받은 '피란민 심사증'에는 본인과 신원 보증자인 남편의 인적 사항, 공란으로 남아 있는 '정당사회단체관계' 항목이 있다. 피란민의 정치적 성향까지 파악하고자 했던 취지를 짐작할 수 있다.

    본적은 황해도 황주군으로 적혀 있다. 안 교수 할아버지가 사과 과수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안 교수는 "공산당 사람들이 '사과는 겉만 빨갛고 속은 하얗다'면서 나무를 다 베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나무도 반동이 되는 세상을 피해 윤기호씨 부부는 1951년 1·4 후퇴 때 부산행 열차를 탔다. 대구까지 왔을 때 더 못 간다며 사람들을 모두 내리게 했다고 한다. 그렇게 정착한 곳이 '임시 주소'란에 적힌 경북 달성군(현 대구 검사동)이었다. 안 교수는 "피란민들이 달리는 기차 지붕에서 떨어져 죽던 일, 맨몸으로 강을 건넌 사람들이 내의에서 얼어 죽은 이를 털어내던 일을 비롯해 피란길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했다.

    '계엄지구 통행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신현모(1894~1975)가 1950년 10월에 받은 것이다. "제헌국회 의원으로서 신원이 확실하고 선무공작원이므로 삼팔이남 계엄지구 전역에 여행을 허가하니 헌병은 편의를 도모할 사(事)"라는 문구에서 6·25전쟁 발발 직후의 엄중했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에 앞서 1950년 6월엔 제2대 신익희 국회의장 명의로 제헌의원의 신원을 확인하는 '증명서'를 받았다. 아들인 신광순(91)씨가 이와 함께 보내온 신현모의 자서전에는 "정준 의원과 나는 의논하기를 세비 이외의 소위 '수당금'은 일절 받지 않기로 하고 이 뜻을 연서(連署)로 국회의장에게 통고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국회에서 이를 회람하도록 의장(신익희)이 배려했으나 일부 의원들은 통고문에 야유와 욕설을 적었다고 한다. 국회의원의 특권을 줄이려는 자발적 노력과 이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제헌국회에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전쟁 앞두고 농지개혁 성사

    경기 시흥시 독자 반길현(70)씨 부친 반관석씨가 1953년 11월에 받은 '명예제대증서'는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준다. 반관석씨는 2사단 일등병(포병)으로 양구 지역 전투에서 적의 포탄에 부상했다. "최고의 명예임을 가찬하여 증서를 수여함"이라는 문구가 무색하게 반길현씨는 "아버지가 복부에 100여 바늘, 허벅지에 30여 바늘을 꿰매고 수술로도 제거하지 못한 작은 파편이 몸에 남아 평생 고생하셨는데도 '수족 절단'이 아니라는 이유로 생전에는 보훈 혜택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부친이 1982년 별세한 이후 제대증을 비롯한 자료를 근거로 유공자 지정을 신청했고 군 병원에서 수술한 기록이 확인되면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49년 6월 21일 제헌국회에서 농지개혁법을 제정·공포했다. 유상매수·유상분배 원칙에 따라 국가가 지주들의 토지를 매수해 농민에게 배분하면서 수확량의 30%를 5년간 현물로 상환하도록 한 법이다. 농지개혁을 통해 땅을 갖게 된 농민들 중에 충북 증평군 독자 연창흠(78)씨 부친 연규정씨도 있었다. '상환 증서' 앞면에는 1950년 3월 25일부터 1954년 12월 31일까지 상환액을 맥(麥·보리)과 정조(正租·벼)로 납입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표기 액면 상환액을 수납 완료하였음을 증명함"이라는 문구가 있다.

    북한은 1946년 소련 군정하에서 토지개혁을 먼저 단행했다.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고 농민에게는 토지의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을 줬다. 이와 달리 농지를 농민이 소유하게 한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은 사유재산제의 초석이 됐다. 토지를 넘긴 지주들은 산업자본가로 성장했다. 농지개혁은 대한민국의 경제적 바탕이 된 셈이다. 6·25 이전까지 대부분의 농지가 분배됐고, 남침을 감행하면 농민들이 호응해 봉기할 것이라던 박헌영 등의 예상과 달리 자기 땅을 가지게 된 농민들은 북한의 남침에 동조하지 않았다.

    계속된 배움… 한국 알리는 노력도

    전쟁 중에도 국민들은 배움을 놓지 않았다. 부산 독자 이원자(83)씨의 빛바랜 국민학교 4학년 학급 사진(1950)에는 "싸우는 이 마당에도 우리들은 배우지요"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씨는 "부산 영도 대한도기 회사 마당의 천막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고 했다. 사진도 이곳에서 찍은 것이다. "피란 학생들이랑 한 반이 돼서 인원이 많았어요. 화판을 목에 걸고 산에 올라가 소나무 밑에서도 공부를 했고, 그 와중에도 산에다 무대를 꾸며 학예회를 다 했습니다."

    1956년 서울 우신국민학교 졸업장을 받은 중구 독자 윤동현(84)씨도 "학교 건물이 '이태리 병원'으로 쓰이고 있어서 천막에서 공부하다가 6학년 무렵 병원이 철수하고 정상적으로 수업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6·25 당시 의료 지원국이었던 이탈리아의 제68 적십자병원이 이곳에 주둔했다.

    윤씨는 실제 1940년생이지만 졸업장엔 단기 4276년(1943)생으로 표기돼 있다. 그는 "1·4후퇴 때 고향 연천을 떠나 피란 생활을 하다가 1954년 영등포에 정착해 우신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면서 "한동안 학교를 못 다녀서 부모님이 나이를 줄여 신고한 것 같다"고 했다.

    예비역 육군 중장 문영일(89)씨는 부산사범학교 재학 시절 구입한 영문판 '한국 화보(Pictorial Korea)' 2권을 간직하고 있다. 화보 잡지사 국제보도연맹에서 6·25전쟁 시기 한국의 사회상을 담아 발행한 사진집이다. 1952년 나온 책에는 "자유와 평화를 위한 사투가 모든 것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문화 활동이 소멸 위기에 몰린 지금, 세계인들이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발간사가 있다. 1954년 책에는 "한국인들이 자유와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할 수 있도록 세계의 독자들이 물심양면 지원해주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이 있다. 문씨는 "당시의 전쟁 상황은 물론 나라의 형편이 그대로 표현돼 있어서 볼 때마다 그 시절을 실감하게 된다"고 했다.
    기고자 : 채민기 기자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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