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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의 선구자들] (4) 첫 화학 박사 이태규

    민태기 공학 박사·'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저자

    발행일 : 2024.02.07 / 여론/독자 A27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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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 최초의 日 제국대학 교수
    1969년 한국인 첫 노벨상 후보

    1902년에 태어난 이태규는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의 전신)를 졸업하고 1920년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는 경성고보 선배 최윤식이 있었다. 최윤식은 1922년 도쿄제국대학 수학과에 진학하고, 이태규는 1924년 교토제국대학 화학과에 진학했다. 이태규는 1931년 조선인 최초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과 29세였기에 국내 언론뿐 아니라 아사히신문 등 일본에서도 크게 주목받았다. 이태규와 동년배로 교토제국대를 같이 다닌 일본 최초 노벨상 수상자 유카와 히데키는 31세에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역시 교토제국대 동창인 일본의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33세에 받았다.

    1935년 5월 4일 조선일보는 이태규의 교토제국대학 조교수 임용 소식을 전했다. 당시 제국대학 조교수는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했기에, 조선인이 이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일본에서도 큰 화제였다. 그만큼 젊은 과학자 이태규는 독보적이었고, 우리도 과학이 가능하다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태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에 도전하기 위해 1938년 미국행을 결심한다. 당시 일본은 미국과 대결 중이었지만 이태규는 아인슈타인이 있던 미국 프린스턴 대학을 고집했다. 비용은 경성방직을 경영하던 김연수가 댔다. 여기서 이태규는 당시 학계의 최대 관심사였던 양자역학을 화학과 접목한 이론을 발전시킨다. 1941년 일본으로 돌아온 이태규는 교토대에서 양자화학을 강의하고, 1944년 마침내 정교수로 승진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태규는 새 국가 건설에 힘을 합치기 위해 귀국한다. 일본 학계의 중심이던 그는 몇 년만 노력하면 충분히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믿었고, 자신도 있었다. 조선의 유일한 대학이던 경성제국대학은 법문학부와 의학부 두 곳만 운영하며 이공계 교육은 없다가 1940년대 들어 처음으로 이공학부를 설치했다. 일본의 패망으로 경성제국대학이 경성대학으로 바뀌자, 이태규는 이공학부장을 맡아 1946년 7월 경성대학 이공학부 첫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리고 며칠 뒤 조선화학회(현재 대한화학회)를 만들었다. 교육과정 개편에도 적극 참여한 이태규는 일제강점기 25%에 불과했던 과학 교육 비율을 75%로 올리는 안을 통과시킨다. 그만큼 이태규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하지만 이때 불어닥친 정치 논쟁이 이태규의 발목을 잡았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와 1946년 미군정이 발표한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으로 학계가 분열한다. 국대안은 경성대학과 여러 공립 전문학교를 합쳐 국립대학 하나를 설립하는 계획으로,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과 결합하며 학내 소요가 시작되었다. 교수가 무려 380명 해임되고 5000명에 이르는 학생이 제적돼 이제 막 독립한 나라의 교육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신설된 서울대학교에서 문리대 학장이 된 이태규는 사태 해결을 위해 백방으로 나섰다. 1947년 2월 그가 발표한 "신성한 학원으로 돌아오라. 조국의 기대에 대한 보답은 바로 이때다"라는 성명서에 제자들의 요구를 미군정과 협상해 어떻게든 학교를 정상화하려는 대학자의 눈물 어린 호소를 담았다.

    이후 이태규가 학생들에게 약속한 대로 미군 대위가 맡던 서울대 총장은 한국인으로 교체된다. 첫 한국인 총장 이춘호는 수학 교수였다. 제적된 학생들을 다시 학교에 불러들여 1947년 9월부터 국대안은 수습 국면에 들어간다. 그런데 10월 집무를 시작한 이춘호는 불과 7개월 만인 1948년 4월 사임한다. 문제는 이태규 학장까지 사임 압력을 받은 것. 이 사태는 공간 부족으로 법대가 문리대 건물의 일부를 요구하자 문리대 학장 이태규가 반발한 것이 배경이다. 결국 이태규는 그해 가을 미국으로 떠났고, 후임은 수학자 최윤식이 맡았다. 일본 못지않은 과학을 꿈꾸었던 이태규는 소모적 분쟁으로 조국을 떠나야 했지만, 그의 교토제국대 동료 교수였던 유카와 히데키는 1949년 일본 최초 노벨상을 받았다.

    1950년 6월 14일 조선일보는 미국으로 떠난 이태규 박사가 유타주립대 교수로 부임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에 정착한 이태규는 앞만 보고 더욱 연구에 매진했다. 얼마 뒤에는 고분자 유체의 점도를 규명하는 이론을 발표해 1969년 노벨상 후보까지 오른다. 이제는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적 석학이 된 것이다. 서울대 법대 교수를 지낸 경제학자 임원택은 해방 정국의 정치 과잉으로 이태규가 한국을 떠난 사실이 안타까워 이렇게 말했다. "정계 개편이나 민주주의 입문이나 엔조이하면서 우리나라가 낳은 천재적 화학자 이태규 박사를 이 땅에서 살지 못하게 만들어놓은 한국 민주주의의 치매성을 조소해 본다."

    그러나 정작 이태규 본인은 현실을 탓하기보다 끊임없이 조국의 과학을 고민했다. 한국에 두고 온 제자들이 혼란 속에서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미국으로 불렀다. 이들이 학위를 받고 귀국하며 대한민국의 과학계를 다시 세웠다. 과학기술을 강조한 박정희 정부의 등장으로 이태규의 존재는 더욱 부각된다. KIST 설립 자문을 받고, 카이스트의 탄생에도 큰 역할을 하며 1973년 귀국해 한국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2년 사망한 그는 국립묘지에 안장된 첫 과학자이다. 식민지 시절 교토제국대학 교수가 된 최초의 화학 박사 이태규는 민족의 자랑이었고, 화학에 양자역학을 도입하며 세계적 연구로 노벨상에 근접한 첫 한국인이다. 무엇보다 그는 해방 후 혼란에도 굴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 힘써 한국 과학의 토대를 만들었다.

    [동갑내기 시인 정지용과 절친… 그의 중매로 결혼]

    1902년생 동갑내기 정지용은 교토 유학 시절 이태규와 친구였다. 이태규는 정지용에게 이끌려 천주교인이 되었고, 정지용은 이태규의 대부가 되었다. 도시샤(同志社)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정지용은 교토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신여성 박인근을 신붓감으로 소개한다. 그녀는 교토 유학생의 리더 이태규를 잘 알고 있었고, 1931년 이태규의 박사 학위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터라 정지용의 중매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32년 이태규는 박인근과 결혼했다.

    1937년 우장춘이 교토제국대학 조교수 이태규를 찾아왔다. 1936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우장춘은 그 업적으로 1937년 9월 교토에 있던 다키이 종묘 회사의 초대 연구농장장으로 취임했다. 우장춘이 박사 학위를 받을 무렵 그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국내 언론에 알려졌다. 그런 우장춘이 이태규를 직접 찾아오며 과학자들의 우정이 시작되었다. 우장춘은 일본인으로 살면서도 '우'라는 성을 끝까지 유지했고, 아버지 우범선이 만들어둔 한국 호적으로 1950년 귀국했다. 이태규 역시 제국대학 교수였지만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1948년 이태규는 미국으로 떠날 때 가족을 서울에 두고 갔다. 곧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이태규는 가족과 소식이 끊긴다. 유타대에서 이태규가 애타게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부산으로 피란 간 이태규의 가족을 찾은 것은 귀국 후 부산에서 종자 개발에 매진하던 우장춘이었다. 우장춘은 우리 사회가 "국보급 과학자와 가족을 모르는 체한다"며 생활고를 겪던 이태규의 가족을 도왔다. 이런 도움으로 전쟁이 끝난 뒤 이태규는 다시 가족과 무사히 만날 수 있었다.
    기고자 : 민태기 공학 박사·'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저자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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