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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4) 두려움에 맞서는 계절

    정수윤 작가·번역가

    발행일 : 2024.02.01 / 여론/독자 A2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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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지않아 봄

    매화꽃 님 보세요

    눈 속의 여인

    春淺し梅樣まゐる雪をんな

    단 한 줄의 편지. 머지않아 봄. 수신인은 매화다. 발신인은 아름다운 눈의 여인. 눈보라 치는 한밤중, 백옥처럼 새하얀 여인이 그윽하게 매화를 바라본다. 매화님,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나요. 이리도 추운 계절에, 그리도 곱게 피어계시다니. 매서운 추위에 맞서는 당신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여인은 엄동설한에 핀 매화가 안쓰러워 짧은 글을 띄운다. 그래요, 봄이 머지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이렇게 하찮은 제가 당신을 응원합니다.

    이 여인은 누구일까? 예로부터 일본의 설국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속의 요괴, 유키온나(雪女)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 당신이 유키온나를 만난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얼음 숨을 입에 불어넣어 사람을 동사시키는 무시무시한 요괴니까. 다만 겨울밤 혼자 노는 아이와 놀아주기도 하고, 추위에 떠는 꽃님에게 편지도 띄우는 걸 보면 본성은 따뜻하다. 환상 문학의 대가 이즈미 교카(泉鏡花, 1873~1939)의 하이쿠다.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귀신 이야기를 다수 남긴 괴담 작가답다. 눈의 요괴가 꽃에게 띄운 편지라니….

    요즘도 2월 초에는 일본 곳곳에서 요괴와 쉽게 마주친다. 창밖으로 도망치는 붉은 도깨비 같은 요괴를 나도 많이 보았다. 그날 밤도 거리를 걷는데, 어느 집 2층 베란다에서 후드득후드득 소리가 나면서 아이들 고함 소리가 들렸다. "요괴는 밖으로, 복은 안으로!" 후드득후드득 소리는 냅다 콩을 집어 던지는 소리였고, 그게 정말로 혼비백산한 요괴가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나는 소리처럼 들린다. 입춘 전날인 2월 3일 절분(節分) 날, 일본인은 집에서 액을 몰아내고 복을 맞이하기 위해 이런 의식을 치른다. 집 밖으로 콩을 뿌리며 "요괴는 밖으로(鬼は外, 오니와 소토)"라고 외치고, 다시 집 안으로 콩을 던지며 "복은 안으로(福は內, 후쿠와 우치)"라고 외친다. 다 마치면 온 가족이 볶은 콩을 먹는다.

    한국에는 이 시기에 입춘방이 붙는다. 나의 작업실 빌라 1층에 사는 남자아이는 자기 집 대문에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을 붙인다. 삐뚤빼뚤 쓴 글자 사이에 물감으로 꽃을 그려 넣은 것마저 귀여워서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미소를 짓게 된다. 지나는 사람들이 보고 짓는 웃음이 그 집에 복을 가져다주는지도 모른다. 올해는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액운은 콩이든 꽃잎이든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기를, 그렇게 빌며 두려움에 맞서는 계절이 입춘이리라. 다가오는 새봄에는 더도 덜도 말고 이 한 줄만 기억하기로 하자. 눈보라 속에서 용맹하게 피어난 당신을, 도깨비도 요괴도 응원합니다.
    기고자 : 정수윤 작가·번역가
    장르 : 연재
    본문자수 : 1357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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