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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궁예와 후고구려

    유석재 기자

    발행일 : 2023.12.07 / 특집 A18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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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장사 승려 출신… 토지 면적대로 세금 매기는 개혁했죠

    최근 경기 양주 대모산성에서 목간(木簡)이 출토됐습니다. 목간이란 글씨를 적은 나뭇조각을 말해요. 그런데 전문가가 이 목간의 123글자를 검토한 결과, 신라·후백제와 함께 후삼국시대 나라였던 태봉(후고구려·901~918)이 남긴 것으로 확인된 최초의 문자 자료라고 합니다. 궁예(?~918)가 세웠던 나라인 태봉은 국호를 '고려'나 '마진'이라고도 했고, 궁예가 왕에서 쫓겨난 뒤 태조 왕건(재위 918~943)의 고려 왕조로 계승됐습니다. 그러니까 태봉이라는 나라의 임금은 궁예 한 명이었던 것이죠. 궁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칠장사의 승려, 중부 지방을 단숨에 장악

    경기 안성에 칠장사라는 고찰(古刹·역사가 오래된 옛 절)이 있어요. 얼마 전 불이 나서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자승 스님이 입적했다고 뉴스에 나온 곳이죠. 칠장사는 '천년 고찰'이라고 하는데, 신라 때부터 있었던 절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칠장사에서 어린 궁예가 13살 때까지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궁예는 어려서 중이 됐다는 것인데,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요?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신라 왕자였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었는데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죽을 위기에 놓였지만, 유모가 구해 키웠다고 합니다. 이때 유모가 높은 곳에서 던져지는 궁예를 받다가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고 합니다. 해상왕 장보고의 외손자라는 설도 있습니다. 왕자 얘기는 나중에 꾸며낸 것일 가능성도 있는데, 신라 내 정치 싸움에서 패배해 몰락한 진골 귀족 가문 출신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서기 891년(진성여왕 5년)에 궁예는 칠장사가 있는 죽주(지금의 안성시 죽산면)를 장악했던 반(反)신라 호족 기훤의 부하가 됐습니다. 서기 9세기 말 신라는 그야말로 말기적(末期的) 상황에 부닥쳐 있었습니다. 왕위를 둘러싼 귀족 간 정쟁으로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졌고, 지방 곳곳에선 호족이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어 갔죠. 신라 관등 제도에 따라 출세길이 막힌 6두품 지식인들이 여기에 가담했습니다.

    바로 이때 새로운 세력을 만든 대표적 인물이 서남부의 견훤과 중부의 궁예였죠. 궁예는 892년 북원(지금의 원주) 호족 양길의 부하로 활약하다가 점차 명주(지금의 강릉)와 송악(지금의 개성) 등으로 세력을 넓혔습니다. 899년 양길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900년 신라 9주(州) 중 옛 고구려 땅에 설치됐던 명주·삭주·한주 대부분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세력 확장이 놀랄 만큼 빨랐습니다.

    철원으로 수도 옮긴 뒤 '관심법' 횡포

    서기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고, 1년 뒤인 901년 궁예는 송악에서 고려(후고구려)를 세워 임금 자리에 올랐습니다. 칠장사 근처에서 기훤의 부하가 된 지 10년 만의 일이었죠. '고려'는 고구려 후기의 실제 국명이었는데,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아 그 지역에 많이 살던 고구려계 호족과 백성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궁예가 빠른 시간에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한 요인은 또 있어요. 승려 출신인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이라 불렀는데, 불교에서 미륵불은 미래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예요. 왕실과 귀족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백성에게 미래 이상 세계를 제시해 민심을 얻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경제적 조치도 있었습니다. 바로 귀족이 가진 토지 면적에 비례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었죠. 신라 역대 왕이 추진했다가 번번이 실패했는데, 궁예는 단번에 이를 개혁해 기존 귀족의 이익을 깎아버렸습니다. 이 제도는 왕건의 고려가 계승하게 됩니다.

    후삼국시대가 개막하면서 궁예는 군사적으로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올라섭니다. 903년 부하 장군 왕건을 보내 지금의 나주인 후백제 금성을 점령했죠. 이제 궁예는 한반도 한가운데에 완전히 새로운 도읍을 정합니다. 904년 청주 백성 1000명을 철원으로 옮긴 뒤 그곳에 궁성을 짓고 새로운 도읍으로 정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왕건을 비롯한 고구려계 호족의 지지를 받고 임금이 됐지만, 이들 세력이 자신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에 궁예가 아예 새로운 지역을 택했다고 해석됩니다.

    하지만 철원 천도 이후 궁예는 광기(狂氣)에 빠져 주변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신하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미륵 관심법'을 쓸 수 있다며 사람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2000년 방송된 TV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김영철)의 대사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는 지금까지도 유명한데, 관심법을 쓰는 중 기침을 한 신하를 질책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관심법은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하나의 방편일 수 있었겠지만, 급기야 궁예는 왕비와 왕자를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918년 홍유·신숭겸 등 장군들이 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내쫓았습니다. 도망친 궁예는 백성에게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DMZ 안에 쏙 들어간 궁예도성

    폭정 때문에 내쫓긴 군주이지만, 궁예와 태봉의 역사적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 진골 귀족 중심의 골품제 사회를 무너뜨렸고, 나아가 신라 왕조 자체의 몰락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를 내쫓은 왕건이 세운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닦았다는 점 역시 중요합니다. 또 백제가 도성인 위례성을 고구려에 빼앗겼던 475년 이후 400여 년 만에 경기·강원 일대 한반도 중부 지역을 다시 정치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했고, 그것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궁예가 새 수도로 삼았던 철원은 정말 한반도의 중심이 맞을까요? 지금 철원 궁예도성의 위치를 보면 한가운데 군사분계선이 지나가고, 성 남쪽은 남방한계선, 북쪽은 북방한계선과 거의 맞닿아 있습니다<지도 참조>. 성 전체가 비무장지대(DMZ) 안에 쏙 들어간 모습입니다. 게다가 남북으로는 경원선 철도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 무슨 역사의 장난인지 기가 막힌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픽] 궁예도성터 위치도
    기고자 :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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