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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걸쳐 3300쪽으로 '주역' 풀어낸 90세 학자

    유석재 기자

    발행일 : 2023.11.27 / 사람 A25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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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역'과 '십익' 해설서 펴낸 윤재근 한양대 명예교수

    서른 살이 될 무렵 부친이 그에게 말했다. "너도 이제 '주역(周易)'과 가까이하거라. 어디서 살든 날마다 주역을 보면 인생의 왕래(往來)에서 순조로운 길이 넓혀짐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구순(九旬) 나이에 접어든 윤재근 한양대 국문과 명예교수가 새 책 세 권을 냈다. '주역' 상·하경과 공자가 지었다는 주역 해설서인 '십익(十翼)'(이상 동학사)이다. 모두 3300여 쪽, 원고지 2만2000장 분량이다. 주역과 십익을 해부하듯, 따로 자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한 글자 한 글자를 꼼꼼이 풀어냈다. 서울 광진구 윤 교수 자택에 있는 12권짜리 '중문대사전'엔 포스트잇 수백 장이 빼곡했다. 키보드를 치느라 손톱이 닳을 지경이라고 했다.

    윤 교수는 1991년 '장자(莊子)'를 쉽게 풀어쓴 책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등이 밀리언셀러가 됐던 왕년의 인기 작가다. "사람들이 5공화국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어요. 길면 길다고 자르고 짧으면 짧다고 늘리려 했던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반감 때문에 책을 많이 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집필에 꼬박 반세기가 걸렸다는 이번 책은 어디에도 대중서의 자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윤 교수는 산골 소년이었다. 경남 함양 백운산 자락에서 약초를 캐는 채약인(採藥人)의 아들로 자랐다. 6·25전쟁이 나자 가족은 빨치산이 창궐하는 산에서 내려와야 했고, 부친은 농사를 지을 줄 몰랐다. 뭘 하며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청년 윤재근은 출가하려고 절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만난 고암(1899~1988) 스님이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너는 중이 되지 말고 대학에 가서 학자가 되거라. 네가 쓴 책 수만 권을 세상 사람들이 읽게 될 것이다." 늦은 공부를 시작해 서울대 영문과에 들어갔을 때 서른 살이었다. 만해 한용운을 연구하는 한편 부친의 뜻을 받들어 주역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왜 주역인가? "많은 사람들이 주역을 점술서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윤 교수는 "주역이 이끌어주는 점은 복채를 들고 점쟁이를 만나는 점치기가 아니라, 내 삶의 왕래를 나 스스로 날마다 점쳐보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책입니다." 주역의 점치기를 역수(易數)라고 하는데 이것은 역수(逆數)와 통하는 말이다. 미리 거슬러[逆] 헤아려보라[數]는 것이다.

    그렇게 내다봐야 할 앞날이란 결코 먼 미래가 아니라고 윤 교수는 말했다. "예전에는 '인생 닷새'란 말이 있었습니다. 그제·어제와 오늘, 내일·모레의 5일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죠." 주역은 오늘로써 그제·어제를 반추하고 곧 다가올 내일·모레의 삶을 건강하게 성취할 수 있는 길잡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일신성덕(日新盛德·훌륭한 덕을 날마다 새롭게 함)인데 허황된 미래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욕심부리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삶을 개척하라는 뜻이다. 경쟁하는 삶이 사납고 치열해질수록 길잡이가 되는 책이 주역이라는 말이다.

    "주역은 6·25 전까지만 해도 식자층의 필독서였어요. 주어가 신(神)인 성경, 여래(如來)인 불경과 달리 주역은 주어가 '나'로 돼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점차 서양 문물이 들어오며 주역은 잊히고 오해받게 됐다는 것이다. '논어' '맹자'와 '노자' '장자'의 번역서도 낸 윤 교수는 "그 책들도 따지고 보면 결국 주역 풀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주역 64괘(卦)를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무심코 주역을 열어 드러나는 괘가 바로 그날 심독(心讀)할 인연이라는 것이다. "경문 자체가 삶의 길잡이인지라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문득문득 마음에 떠오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25괘를 펴들면 '밭 갈면서 수확을 생각하지 않고 첫째 밭을 일구면서 삼 년 뒤에 좋은 밭이 되리라 여기지 않으니, 곧 갈 바가 있어 이롭다'는 문장이 나온다. 일을 하면서 탐욕을 부리지 않고 순리대로 성과를 얻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윤 교수는 자택 연구실에서 또 다른 집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과거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게 했던 '장자'의 결정판이라고 한다. "중요한 부분을 정선해서 책만 보고 독학이 가능하도록 쓰고 있어요. '장자' 훈장 노릇 제대로 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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