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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明 마지막 황제 숭정제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발행일 : 2023.11.22 / 특집 A3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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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런했으나 의심 많고 조급해 명나라 망쳐

    중국에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1611~1644)를 다룬 한 역사서가 지난달 중순 갑자기 회수 조치되는 일이 일어났어요. 명나라 역사 전문가 천우퉁이 쓴 '숭정: 부지런히 정사를 돌본 망국 군주'라는 제목의 책인데 9월 출간 이후 한 달여 만에 중국 서점에서는 물론, 인터넷 전자책까지 모조리 사라졌다고 해요. 이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어요. 그중에는 이 책이 숭정제에 빗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풍자했다고 판단한 중국 당국이 책을 회수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아요. 숭정제가 어떤 황제였기에 이런 해석까지 나오는 걸까요?

    소실 소생이었으나 이복형 요절로 즉위

    명나라 마지막 16대 황제 숭정제의 본명은 주유검으로, 태창제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태창제는 숭정제의 어머니를 총애하지 않았고, 숭정제는 소실 소생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복형 천계제가 22세 나이로 요절하고 천계제의 아들들마저 모두 일찍 죽자, 그는 1627년 16세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환관의 지나친 정치 개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어요. 특히 천계제 때 환관 위충현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위충현은 천계제 즉위 전부터 그의 시중을 들며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천계제가 즉위하자 엄청난 권세를 누렸어요. 천계제는 그에게 모든 일을 일임했고, 환관 세력은 내각과 행정 기관 6부뿐 아니라 비밀 정보기관인 동창과 서창, 황실 호위를 맡는 금의위 등을 모두 장악했어요. 그의 국정 농단이 심해지자 위충현을 파면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숭정제도 그의 위세를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즉위 직후부터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환관이 진상(進上)하는 음식도 먹지 못할 정도로 고민했답니다. 하지만 섣불리 그를 건드렸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전략을 택했어요.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섬겨왔던 환관과 측근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신변을 보호하고자 했죠. 시간이 흐르며 점차 위충현을 탄핵하라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어요. 위기에 몰린 위충현은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해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후 약 2년간 그와 관련된 관리 260여 명이 사형이나 파직을 당했습니다.

    의심 많은 성격, 독이 되다

    숭정제는 환관 세력 때문에 붕괴 지경에 이르렀던 국가조직을 정비하고, 민생 안정에 노력을 기울였어요. 그는 경전을 읽으며 역대 성군과 어진 신하들의 정치와 가르침을 배우고자 했고, 조정에 나가 대신들과 국사를 의논했어요. 집권 초부터 모든 관리에게 '벼슬에 기대어 금전을 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조했어요. 자신도 재위 17년 동안 근검절약했고 황궁에서 어떠한 대규모 토목공사도 벌이지 않았어요. 백성의 부역을 덜어주고 재화 낭비를 막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그에게는 의심이 많다는 결점이 있었습니다. 성격이 조급하고 눈앞의 성과에만 집착해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신하들을 내치거나 처단했어요. 농민반란을 진압할 때에도 국방 최고 책임자인 병부상서가 수시로 바뀌었고, 전장에 파견한 장수도 조금만 의심이 들면 파면했어요. 또 일이 잘못되면 신하들에게 책임을 미뤘어요. 죽기 직전 작성한 유서에도 '나라가 혼란해진 것은 모두 신하들 탓'이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죠. 그렇게 그의 재위 기간 무려 40여 명의 각료가 파면되거나 사형당했어요. 그러다 보니 모두가 책임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지 않게 됐습니다.

    그의 가장 큰 실수도 이 의심에서 비롯됐어요. 17세기 북쪽에서는 만주족이 후금(후일 청나라)을 세우고 명을 위협하고 있었어요. 그들은 산해관 이남으로 진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죠. 하지만 당시 국방 수비를 맡은 병부상서 원숭환이 방어선을 탄탄히 구축하며 맞섰죠. 청은 의심 많은 숭정제의 성격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원숭환이 청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원숭환을 시기하던 무리가 이를 틈타 '원숭환이 무리하게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으려 한다'고 숭정제에게 고했죠. 결국 황제는 그를 불러들여 능지처참에 처하게 했습니다. 명나라 역사서에는 '원숭환이 누명을 쓰고 죽은 뒤로, 명에서는 더는 변방의 일을 맡을 인재가 없었다. 이때부터 명나라는 사실상 패망의 길을 걷게 됐다'고 기록돼 있어요. 실제로 명나라 군대는 청의 공격에 속수무책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농민반란으로 무너지다

    하지만 명을 무너뜨린 것은 청이 아닌 내부 농민반란이었어요. 당시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산시성 일대에서는 거의 해마다 자연재해가 발생했어요. 상소문에는 백성이 나무껍질을 먹고, 이마저도 없으면 돌을 캐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급기야 어떤 지방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 극단적인 일까지 벌어졌어요. 17세기 중반엔 전염병까지 퍼져 시신이 들판을 가득 채웠죠. 하지만 숭정제는 청과의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징수했어요. 결국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는데, 대표적 인물이 이자성이에요. 그는 산시성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했고, 가는 곳마다 부잣집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에게 곡식과 재물을 나눠 주며 절대적 지지를 얻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1644년 시안에서 국가 이름을 '대순'으로 정하고 스스로 황제가 됐습니다. 이자성은 군사를 일으킨 지 두 달 만에 파죽지세로 베이징을 함락했어요. 당시 명은 농민반란을 쉽게 진압할 수 있다고 보고 주력부대를 산해관에 배치했는데, 이것이 큰 패착이었죠.

    다급해진 숭정제는 대신들을 찾았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오직 태감 왕승은만 그의 곁에 남아있었어요. 숭정제는 황후와 비빈들에게 자결을 명했고, 자식들은 피신하게 하거나 자기 손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왕승은과 함께 황궁 뒤 산으로 올라가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그의 나이 33세, 매우 쓸쓸하고 이른 죽음이었습니다.
    기고자 :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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