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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APEC과 美 시민들의 희생

    오로라 실리콘밸리 특파원

    발행일 : 2023.11.21 / 여론/독자 A38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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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둘째 날인 지난 1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APEC 행사장 근처로 운전하던 중 길을 잘못 들었다. 내비게이션의 새로운 경로 탐색을 기다리길 10초쯤 지났을까. 5분 정도 지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다르게 스크린에 표시된 예상 도착 시간은 기존 '4분 후'에서 갑자기 '1시간 35분 후'로 널뛰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동부 위성도시인 오클랜드로 향하는 해상 대교 '베이브리지'를 실수로 타게 된 상황에서, 내비게이션은 간단한 U턴 경로 대신 북쪽으로 60㎞가량 우회하는 황당한 길을 '최단 경로'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국내로 치면 송파구로 진입하기 전 하남 방향으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의정부까지 한 바퀴 돌고 서울에 재진입하라는 식의 황당한 안내인 셈이다.

    이런 교통 안내가 나온 이유는 이날 오전부터 오클랜드에서 샌프란시스코 방향으로 향하는 베이브리지 위 도로가 APEC 기간 열린 대규모 시위로 완전히 막혀버렸기 때문이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휴전을 요구하는 시위대는 출근 시간인 오전 7시부터 도로 위를 점거하고, 하얀 천을 뒤집어쓰고 누워 '시체 시위'를 이어갔다. 베이브리지는 오클랜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다. 이 길이 막히면 북쪽으로 20km 넘게 떨어진 '리치먼드 브리지'를 타고 우회 진입하는 방법이 그나마 최선이다. 내비게이션이 말도 안 되는 1시간 35분짜리 경로를 제안한 것은 결코 오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날 꽉 막힌 다리 위에선 자동차 위에 올라서서 시위가 언제 끝나는지 애타게 지켜보는 사람, 어디론가 급하게 통화를 하며 울분을 터뜨리는 사람, 포기한 듯 차에서 내려 길가에 주저앉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한 현지 주민은 "차 안에서 화상으로 회사 회의에 참석했다"며 "화장실도 못 가고 끔찍했다"고 했다. 시위는 6시간 만인 오후 1시쯤에 끝났지만, 하루를 그대로 날려버린 시민들의 손해를 보상해주는 곳은 없었다.

    이는 APEC 기간 시민들이 겪은 불편함의 일부에 불과하다. 시(市) 당국이 행사장서 1km 거리에 있는 우범 지대 '텐더로인'의 정리에 나서면서, 그나마 깨끗했던 외곽 주택가에 텐더로인서 쫓겨난 노숙자와 펜타닐 마약에 취한 사람들이 출몰했다. 행사장 주변 도로를 통제하는 바람에 평소 10분이면 가던 출근길을 40분 넘게 우회해서 가야 하기도 했다.

    지난 15일 열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기업인들의 만찬에선 시 주석의 연설에 10번 넘는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고 한다. 각국 정상과 기업인들은 APEC 행사장에 나타나기만 하면 당연한 듯 박수를 받았다. 심지어 극성 시위를 벌이는 단체들마저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지지자들이 있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 밖의 시민들 희생을 신경 쓰는 사람은 드물다. 묵묵히 불편을 감수한 그들에게도 누군가는 박수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기고자 : 오로라 실리콘밸리 특파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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