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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누가 사기꾼의 먹잇감이 되는가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발행일 : 2023.11.21 / 여론/독자 A37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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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 4년 차에 사기를 당했다. 당시 유행하던 기(氣) 관련 특집 기사를 준비하다가 어떤 기 수련 단체를 알게 됐다. 중국에서 대단한 능력의 기 수련가가 온다고 했다. 죽은 닭을 살려내고 공중 부양도 한다고 했다. 그들은 미심쩍어하는 나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설득했다.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이 오면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얼마 뒤 그 도사가 정말 한국에 왔는데 20대 젊은 친구였다. 군살이라곤 전혀 없는 몸매에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처럼 표정과 어조가 근엄했다. 산 닭의 목을 칼로 친 뒤에 기를 불어넣어 봉합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투가 마치 닭고기만 있으면 닭곰탕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봉오리만 맺힌 꽃에 기를 불어넣어 즉석에서 만개(滿開)시킬 수 있다고 했고 가부좌 상태에서 공중에 떠오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기 수련은 서커스가 아니므로 그런 행위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고도 했다.

    나는 그의 위세에 기가 눌렸고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기의 경지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신문사에 와서 시범을 보여주면 기사로 쓰겠다고 제안하니 그는 흔쾌히 수락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중국 무슨 산에 오면 840세 넘은(84세가 아니다) 자신의 스승을 전 세계 언론 최초로 인터뷰시켜 주겠다고. 나는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하는 대신 세계적 특종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사기꾼들의 스케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다.

    며칠 뒤 신문사로 온 그는 몸이 좋지 않아 닭 부활 쇼와 공중 부양은 어렵다며 꽃 피우는 건 할 수 있다고 했다. 여러 명의 제정신인 동료와 사진기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꽃봉오리에 장풍을 불어넣는 시늉을 하더니 손바닥으로 꽃을 문질러 펴기 시작했다. 그가 다 피웠다고 내민 꽃은 말 그대로 뭉개진 꽃봉오리였다. 그가 쫓겨나다시피 떠날 때 나도 회사에서 쫓겨나는 줄 알았다. 중국 가짜 도사가 신문에 보도되지는 않았으므로 여러 사람 점심시간 빼앗은 죄만 인정됐다.

    경중(輕重) 차이는 있어도 누구나 한 번쯤 사기를 당한다. 전세 사기나 보이스피싱처럼 아무 잘못 없이 사기에 걸려들기도 하지만 욕망을 좇아 사기꾼 손아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한때 백화점에서 물건 가격을 두 배로 매긴 뒤 50% 세일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다. 물건을 반값에 사고픈 욕망이 사람들을 사기 세일에 빠뜨렸다. 1992년 대법원이 이런 상술을 사기죄로 인정하면서 관행은 사라졌다.

    지난 2007년 수많은 사람이 "저 민정인데요. 저한테 전화번호 준 오빠 맞죠? 사진 보고 맞으면 문자 주세요"라는 문자를 받았다. 무려 40만명이 확인 버튼을 눌러 엉뚱한 사진을 봤고 휴대폰 요금에서 정보 이용료 2990원이 결제됐다. 범인들은 3000원 미만은 본인 확인 없이 자동 결제되는 점을 악용해 어떤 민정이가 나를 찾나 하고 설렌 남자 수십만명에게 17억원을 뜯었다.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거나 존경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비판적인 경향이 있다. 당신은 장점으로 살리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성격 검사 결과가 이렇게 나왔다고 치자. '나에게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1948년 미국 심리학자 버트럼 포러가 모든 실험 대상자에게 이런 검사 결과를 주고 '당신과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묻자 응답자들은 평균 4.2점(5점 만점)을 줬다. 나는 최근 유행한 MBTI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향을 심리학 용어로 '바넘 효과'라고 한다. 바넘은 19세기 미국에서 관객 속마음 알아맞히기로 유명했던 마술사다. 바넘을 비롯한 점쟁이들은 이런 말을 확신에 찬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는 기술자다. 점을 보는 것은 신통력에 의지하고픈 욕망 때문이다. 우리 동네엔 점 보는 노점이 하나 있는데 그 출입구에 딱 두 문장이 쓰여 있다. "언제 재물이 생기나? 언제 애인이 생기나?" 사람들의 가장 큰 욕망이 정확히 응축돼 있다.

    유명 펜싱 선수는 어떤 욕망 때문에 사기꾼에게 걸려들었을까. 그가 사기를 공모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최악의 피해자인 것도 사실이다. 재벌의 사생아이며 승마 선수였고 자산이 51조원이나 되는데 여자이기도 남자이기도 한 시한부 환자라니, 세상의 모든 막장 드라마를 합쳐도 압도하고 남을 사기 사건을 보며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기고자 :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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