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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원 간섭기 제주(탐라)

    이환병 관악고 교감

    발행일 : 2023.11.16 / 특집 A3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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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元 통치 100년 받으며 고기 국물 음식, 고소리술(조·보리로 만든 술) 유행

    최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를 찾은 우리나라 여행객 사이에 '몽탄 신도시'라는 신조어가 생겼어요. 한국식 아파트, 편의점, 카페, 제과점 등이 경기도 '동탄 신도시'와 비슷하고, 한글로 된 간판도 많기 때문이에요. 몽골은 우리나라가 고려 시대 100여 년간 원 간섭기를 겪으며 교류가 많았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제주(탐라)가 원의 직할지로 가장 오랜 기간 직접 원의 지배를 받았던 곳이라는 사실, 알고 있나요? 몽골 지배 기간 제주의 변화와, 고려가 제주에서 몽골 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삼별초 항쟁 계기로 제주에 몽골인 거주

    '고려사' 원종 때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제주에는 주민 1만2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어요. 1273년 원과 고려 연합군이 삼별초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에 군대를 파견했는데, 항쟁을 진압한 뒤 '탐라초토사(耽羅招討司)'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몽골군 700여 명이 주둔했어요. 이때 몽골인의 제주 거주 역사가 시작하고, 제주가 원 직할지가 된 것이죠.

    제주를 남송과 일본을 공격할 군사적 요충지로 여긴 원은 말을 기를 목마장을 제주에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충렬왕 때 말 160필을 방목했고, '동아막'과 '서아막'이라 부르는 목마장을 설치했어요. '아막'은 넓게는 고려의 도(道)나 군(郡)에 해당하는 행정 단위이고, 좁게는 목장을 관리하는 본부 역할을 했어요. 동서 아막 안에는 몽골인의 전통 집인 게르와 성(城)이 있었다고 추정해요. 목마장에는 말뿐 아니라 소, 낙타, 당나귀, 양 등도 방목해 키웠어요.

    목장을 설치한 초기, 원 제국은 제주에서 말을 실어 내지 않았지만, 1295년 이후에는 관리를 보내 말을 실어 날랐어요. 1320년쯤에는 제주 목마장이 원의 대표적 목장 14곳에 들어갈 만큼 번성했지요. 원의 직할 지배를 받은 제주는 고려 영토에 일시적으로 포함되기도 했지만, 원의 경제적 지배와 수탈은 계속됐어요.

    원이 제주를 직할지로 지배하면서 목마장을 운영하는 관리인 '목호(牧胡)', 일반 주민과 군인, 원 정권에서 밀려난 유배자, 죄인 등이 원에서 제주로 이주했어요. 원 제국 군인과 목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상당수는 제주에서 통혼해 정착했어요. 초기 통혼은 몽골인과 제주 여성 사이에서 이뤄졌고, 점차 세대를 거치면서 그들의 자녀끼리도 혼인했어요. 몽골인뿐만 아니라 통혼한 사람도 제주에서 지배층을 형성하며 점차 세력을 강화해 나갔어요.

    원의 지배와 몽골인의 제주 이주는 음식 문화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원래 제주 사람은 해산물과 채소류를 주로 먹었는데, 몽골인이 대거 이주한 후에는 고기를 많이 먹기 시작해요. 몽골인은 양고기를 물에 끊인 음식 '슐루'를 많이 먹었는데, 그 영향으로 제주에서는 돼지고기와 소고기에 각종 채소를 넣고 끓이는 국물 요리가 유행했습니다. 몽골인은 양의 내장으로 순대(게데스)를 만들었는데, 그 요리법이 전해져 제주에서는 돼지 내장으로 순대를 만들어 먹었어요. 또 몽골에서는 발효한 젖술(마유주)을 증류해 무색 투명하고 알코올 농도가 짙은 소주를 빚었는데, 제주에서는 조나 보리를 사용해 만든 고소리술이 유행했어요.

    말 관리하며 득세한 '목호' 세력 정벌

    공민왕 때는 제주에서 '하치'라고 부르던 목호 세력이 지배층을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원이 설치한 국립 목장 '아막'에 소속돼 말, 소 등을 사육했어요. 그러나 원이 쇠퇴하고 중국 강남 지역에 명(明)이 들어서면서 제주 목호 세력도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공민왕이 반원(反元) 정책을 시행하고 제주 목호 세력을 압박하자 목호들은 제주에 파견된 고려 관리를 살해했습니다. 고려와 목호 세력 간 첫 충돌이었고, 원 멸망 후에도 제주에서는 목호들이 세력을 유지해 이런 충돌이 지속됐습니다. 당시 고려는 명이 원을 대신해 제주를 지배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어요.

    명은 공민왕 21년(1372년) 관리를 보내 제주의 말을 실어 가려고 했습니다. 고려는 명에서 파견한 관리, 고려 관리, 말 운반에 필요한 인력을 제주로 보냈으나, 목호 세력은 이들 대부분을 살해했어요. 공민왕 23년(1374년)에는 명의 사신이 "원이 말 2만~3만필을 제주에 남겨 둬 방목했으니, 많이 번식했을 것이다. 고려 왕이 좋은 말 2000필을 가려 뽑아 보내오게 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고려에 전했어요. 하지만 제주 목호 세력은 말 300필만 내줬어요. 결국 고려는 새로 등장한 명과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호 세력 토벌을 결정합니다.

    공민왕은 목호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최영은 전국에서 차출한 정예군 2만5605명과 전함 314척으로 출정군을 구성했어요. 총사령관 최영과 휘하 장군은 홍건적과 왜구 토벌 과정에서 성장한 군인 출신이었고, 전투 경험이 풍부했어요.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위해 출정한 병사가 3만8830명이었으니, 목호 세력을 정벌하기 위한 군대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죠. 목호 세력은 기병 3000여 명과 보병을 거느리고 있었어요. 초기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패배했으나, 최영은 1개월 전투 끝에 목호 세력을 서남부로 밀어냈어요. 전투에서 밀린 목호 세력은 서귀포 앞바다 범섬으로 피신했다가 항복하거나 자살했어요.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은 목호 세력 토벌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최영이 목호 세력을 정벌하는 동안 공민왕이 시해됐고, 10세의 어린 우왕이 즉위했어요. 명은 우왕에게 말을 계속 바치라고 요구했죠. 우왕 이후 고려는 말 약 3만여 필을 명에 바치는데, 그중 약 2만필이 제주에서 키운 말이었어요. 우왕과 최영이 명에 반감을 갖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겠죠. 또 우왕은 최영이 제주를 정벌하느라 개경에 없었기 때문에 공민왕이 시해됐다고 생각했어요. 우왕은 최영이 직접 요동 정벌을 나가는 데 반대했고, 그 결과 이성계가 정벌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가다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죠. 이렇게 보면 최영의 제주 목호 세력 정벌이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고자 : 이환병 관악고 교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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