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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섭의 그레이트 게임과 한반도] (14) 신해혁명과 대한독립운동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발행일 : 2023.11.09 / 여론/독자 A34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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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에 희망 준 신해혁명… 하지만 중화민국은 우리 臨政 승인 안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의 참패로 청 황실의 권위는 무너졌다. 전제정을 고수하면서 서양의 군사 기술만 이식하려던 양무운동은 실패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처럼 입헌군주정으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한족 유교 지식인들의 건의를 받아들였던 광서제와 달리 서태후(西太后) 등은 입헌군주론을 만주 황실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1910년 8월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것은 대청제국에도 큰 충격이었다. 1911년 5월 아이신기오르 이쾅(1838~1917) 내각이 구성되어 입헌군주정을 흉내 냈지만 만주족 일색이었다. 한족 엘리트들의 불만은 1911년 10월 우창(현재의 우한)에서 분출했다.

    1912년 정치 체제 정도가 아니라 국가 체제가 바뀌고, 2000년 전 진시황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황제정이 막을 내렸다. 1911년 신해(辛亥)년에 일어난 거사는 혁명이 되었다. 1776년 미국 독립혁명이나 1789년 프랑스대혁명보다 더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혁명이었지만 곧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가려지기도 했다.

    1911년 우창(우한)에서 시작된 신해혁명

    2019년 말 코로나19가 발원했던 우한은 1926년 우창(武昌), 한양, 한커우가 합쳐진 도시다. 1911년 10월 10일 우창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자 청 황실은 한족 출신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에게 진압을 맡겼다.

    일찍이 조선에서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관여하며 출세했던 위안스카이는 대세를 간파했다. 그는 1911년 12월 영국의 중재로 혁명파와 담합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죽은 루이 16세처럼 되지 않으려면 선통제가 퇴위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정작 위안스카이 자신은 1915년 황제가 되어 중화 제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신해혁명으로 시작된 시대의 흐름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신해혁명의 사상적 지도자, 쑨원(孫文)

    1912년 중화민국 초대 임시대총통이 된 쑨원(孫文, 1866~1925)은 우창 봉기 당시 미국 콜로라도주의 덴버에서 혁명 자금을 모으고 있었다. 당시 덴버는 신흥 금광 도시였다. 아시아계 광산 노동자들이 많았다.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에 참석했던 이상설(1870~1917)이 1908년 이승만, 박용만 등과 함께 애국동지대표자회의를 개최한 곳이기도 했다.

    이미 1879년부터 하와이에서 유학했던 쑨원은 미국에서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영국령 홍콩의 서양의학원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던 쑨원은 멸만 흥한을 내세웠던 태평천국의 역사에 공명했다. 청일전쟁이 일어났던 1894년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했다. 흥중회는 태평천국과 마찬가지로 "만주족 축출"을 주장했다.

    신해혁명이 자극한 민족 독립운동

    1912년 난징(南京)에서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베이징에서 선통제 푸이가 퇴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청일전쟁으로 유교적 천하 질서가 무너진 데 이어서 신해혁명으로 유교적 천하 질서의 꼭짓점이었던 천자(天子)도 사라졌다.

    신해혁명의 모델이 되었던 프랑스대혁명은 비교적 동질적인 민족 공동체 안에서 분출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신해혁명은 소수 만주족의 지배에 대한 다수 한족의 오랜 분노가 폭발한 성격이 강했다. 그것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들을 배제한 채 백인 위주의 민권을 주장했던 미국의 독립혁명과 더 비슷했다.

    쑨원의 삼민(민족, 민권, 민생)주의에서 민족은 한족(漢族)을 의미했다. 한족 중심의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만주족 중에서는 고향 만주로 돌아가 독립국을 세우고자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이슬람 문명권과 인접해 있던 회(回·위구르)족들도 민족 독립을 추구했다. 북몽골 지역에서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복드 칸이 독립을 선언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던 티베트에서는 1912년 달라이 라마 13세가 다음과 같이 포고했다. "내지 각 성의 인민이 이미 군주를 쫓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이제부터 한인들이 그전 티베트에 보낸 공문들과 정령들은 따르지 말지어다."

    쑨원은 한족과 비한족을 아우르는 오족공화론을 주장하며 다른 민족들이 독립국가를 세워 분리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우창 봉기 당시 사용된 18성 기(旗)도 버렸다. 18개 성에는 만주, 몽골, 티베트, 신장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5족 공화를 상징하는 오색기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5족 공화론 대신 한족에 동화된 중화 민족론이 강화됨에 따라 오색기마저 점차 기억에서 사라졌다.

    대청 제국보다 먼저 사라졌던 대한제국

    신해혁명 1년 전인 1910년 대한제국의 황제정은 일본에 병합되면서 막을 내렸다. 일본은 순종 황제를 강박하여 다음과 같은 칙유문을 발표하도록 했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일본은 대한제국의 황족을 일제의 은급을 받는 왕공족(王公族)으로 만들었다. 한반도를 북해도(北海道·홋카이도)와 대칭되는 남해도(南海道)라고 부르려다가 다시 조선(朝鮮)으로 되돌려 놓기도 했다. 대한제국 황족 중심의 독립운동은 전개되지 않았다.

    신해혁명이 촉진한 민주적 대한독립운동

    황제정에 절망한 대한독립운동가들에게 신해혁명은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신규식은 신해혁명 발발 이후 재산을 정리해서 압록강을 건넜다. 신규식은 나중에 청산리전투의 영웅이 되는 이범석 등을 신해혁명 노선에 따라 교육하는 운남 강무(講武)학교로 보내 군사학을 공부시켰다.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파견되는 김규식, 몽골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의사(醫師) 이태준 등도 신해혁명의 영향을 받고, 아시아 대륙으로 갔다.

    안창호 등이 주도했던 미국의 대한인국민회는 기관지 "신한민보" 1912년 1월 29일자 별보(別報)를 통해 신해혁명 성공을 위해 군비를 지원하자고 호소했다. 한국 독립을 위해 "1천 년에 한번 얻기 어려운 기회"라고 본 것이다.

    신해혁명의 결과 중화민국이 수립된 것처럼 1919년 3·1운동의 결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쑨원과 그의 후계자 장제스(蔣介石)는 한족 중심적 혁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려와 대만을 회복하여 중화를 공고히(恢復高臺, 鞏固中華)" 하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바꾸어 놓은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과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 및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신해혁명 직접 참가한 독립운동가 김규흥]

    1911년 10월 신해혁명에 직접 참가했던 김규흥(金奎興·1872~1936·사진)의 역할은 배경한의 연구를 통해 자세히 밝혀졌다. 김규흥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의 적국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서 활동했다. 일본의 적국이 승리하면 독립의 공간이 넓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영, 미, 프랑스와 함께 전승국이 되자 김규흥은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 우쓰노미야다로(宇都宮太郞)와 접촉했다(박걸순의 연구). 김규흥은 하와이에서 군대 양성을 도모하다가 이주한·박용만과 함께 흥국실업은행을 설립했다. 중화민국과 일본의 자금까지 끌어들여 옛 고구려 땅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은 만주족을 앞세워 만주국을 세우고, 소련과 만주국 사이에 유대인 완충국도 만들고자 했었다(6족 협화).

    쑨원은 별세하기 몇 달 전인 1924년 11월 일본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민족들의 대연합, 즉 대아시아주의가 실현되어야 하며… 소련과의 연합도 모색해야 한다." 대한독립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러일전쟁 전후의 동양평화론처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아시아주의는 새로운 미혹(迷惑)이었다.
    기고자 :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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