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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 사이언스의 별들] 제약업계 특허 카르텔에 맞선 '인도의 제약왕' 유수프 하미드

    박건형 테크부장

    발행일 : 2023.11.07 / 여론/독자 A32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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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달러에 에이즈 복제약 팔아… 빈민에겐 메시아, 글로벌 제약사엔 해적왕

    메시아, 선구자, 로빈후드 소리를 듣는 과학자이자 기업가가 있다. 그가 만든 에이즈 치료제는 수천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 1500만원짜리 치료제를 80만원에 내놓고, 그마저 비싸다고 하자 다시 절반으로 가격을 낮췄다. 더 저렴한 약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치며 때로는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자기 이익을 포기했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는 그를 파괴자이자 악몽이라고 비난한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특허 질서에 맞선 그의 연구실을 '해적왕의 소굴'이라 폄하한다. 인도 제약 회사 '시플라'의 유수프 하미드(Yusuf Hamied·1936~) 명예회장처럼 극단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의 연구와 사업은 반세기가 넘는 동안 끊임없는 논란 대상이었다. '돈이 아닌 생명이 내 사명'이라는 그의 좌우명은 다른 누구가에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도둑질을 정당화하는 말로 여겨졌다.

    창고 정리부터 시작한 '화학 박사'

    판사였던 유수프의 할아버지는 1920년대 아들 호자 하미드(Khwaja Abdul Hamied·1898~1972)를 봄베이(현재의 뭄바이)에서 영국행 배에 태웠다. 당시 인도 특권층에서는 법학 학위를 받고 변호사가 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호자는 중간에 배를 바꿔 타고 독일 베를린으로 향했다. 법 대신 그가 택한 것은 화학이었다. 훔볼트대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호자는 리투아니아계 유대인과 사랑에 빠졌다.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 신봉자이자 민족주의자인 호자는 선진국에서 배운 지식을 영국 식민 지배에 신음하던 조국을 위해 써먹기로 결심했다. 1935년 자본금 20만루피(약 300만원)로 설립한 '화학공업 및 제약 연구소(Chemical Industrial & Pharmaceutical Laboratories)', 오늘날 시플라(CIPLA)라 부르는 인도 최초 제약사가 이렇게 탄생했다. 인도에는 기술도 전문 인력도 충분치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전환점이 됐다. 유럽에서 인도로 오는 의약품이 완전히 끊기자 시플라는 다른 약 성분을 복제한 제네릭(generic) 의약품을 생산해 저렴하게 공급했다. 말라리아·결핵·당뇨병·관절염 치료제를 만들었고 비타민C와 B12까지 생산했다. 호자의 아들 유수프도 화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호자는 아들과 함께 인도를 여행하던 생화학 물질 합성의 대가 알렉산더 토드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찾아가 "학생을 받는 기준이 있느냐"고 물었고 토드는 "내가 적합한 인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유일한 기준"이라고 답했다. 토드의 면접을 통과한 유수프는 1960년 화학 박사가 되어 인도로 돌아왔다. 토드가 1957년 노벨 화학상을 받으면서 세계 최고 과학자의 제자라는 타이틀까지 가져왔다.

    인도를 값싼 의약품 천국으로 만들어

    25세에 시플라에 입사한 유수프는 창고를 정리하거나 공장에서 일하면서 모든 것을 바닥부터 배웠다. 호자는 아들에게 한 가지만 강조했다. "이 회사가 왜 탄생했는지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유수프는 연구와 기술 개발이 시플라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뉴욕타임스는 "그는 항상 1950년대 케임브리지에서 화학을 공부하던 시절부터 적어온 노트를 들고 있었다"면서 "페이지마다 화학식과 구조를 그린 그림과 메모가 가득했다"고 했다. 유수프는 의학·제약 학술지도 닥치는 대로 구독했다. 구독료만 연간 15만달러에 이르렀다. 1970년 그는 고혈압, 부정맥 등을 치료하는 프로프라놀롤의 복제약을 만들어 싸게 공급하기 시작했다. 오리지널 제품을 만든 영국 화학 회사 ICI가 곧바로 특허 소송을 제기했고 인도 정부를 압박했다. 유수프는 인디라 간디 총리에게 "발명가가 우리 피부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인도인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할 약을 쓸 수 없어야 합니까"라는 편지를 보냈다. 간디 총리는 시플라에 날개를 달아줬다. 곧바로 특허법을 바꿔 같은 성분이라도 제조 공정이 다르면 특허가 적용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서구 제약 회사들의 놀이터이자 세계에서 가장 의약품이 비쌌던 인도가 가장 값싼 의약품 천국으로 바뀐 순간"이라고 했다.

    2000년 8월 유수프는 글로벌 제약 카르텔을 파헤쳤던 뉴욕포스트 기자 윌리엄 하다드와 함께 국경 없는 의사회를 만났다. 그들은 "당신이 값싼 에이즈약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다국적 제약사의 카르텔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자"고 했다. 한 달 뒤 브뤼셀 유럽위원회에서 유수프는 3분 연설로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에이즈 치료제를 연간 600달러에 판매하고 자체 생산하는 국가에는 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인도·아프리카 2400만명 목숨 구해

    당시 에이즈에는 스타부딘, 라미부딘, 네비라핀 등 세 가지 항레트로바이러스제를 혼합한 칵테일 요법이 유일한 치료제였다. 세 약물은 각기 다국적 제약사가 만들었고 환자 한 명의 치료비는 연간 1만2000달러였다. 개발도상국과 제3세계 환자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가격이었다. 유수프는 1986년 이 약물들이 논문에 처음 등장한 당시부터 개발법을 연구한 끝에 세 약물을 알약 하나에 담은 트리오뮨을 만들었다. 국경 없는 의사회가 600달러도 비싸다며 난색을 보이자 하루 1달러, 연 360달러에 판매하기로 했다. 트리오뮨은 인도 일부 지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 르완다 등 아프리카 국가로 보급되기 시작했고 2400만명 이상의 목숨을 구했다. 2004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트리오뮨이 오리지널 의약품과 효능이 같다고 인정했다. 다국적 제약사 39곳이 인도 정부에 특허 침해 대응을 촉구했다. 인도 정부는 "훨씬 저렴한 가격에 같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격 책정이 잘못됐다는 뜻"이라고 대응했다. 시플라가 이 시기 트리오뮨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거의 없었다.

    유수프는 환자가 필요하다면 어떤 약이든 만들었다. 우울증 치료제 프로작, 항진균제 디플루칸, 궤양 치료제 프릴로섹,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화이자, 노바티스 같은 글로벌 제약사에 연간 수조원 이익을 가져다주는 약품이다. 시플라는 지금까지 무려 800여 종 이상 제네릭 의약품을 만들었고 오리지널 의약품 가격의 20~50분의 1 가격에 출시했다. 유수프는 2000년 인터뷰에서 "우리 매출은 연간 2억달러지만, 미국 가격으로 같은 제품을 판다면 40억달러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2006년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하자 로슈의 타미플루 복제에 성공하며 세계적인 타미플루 사재기 사태 극복을 이끌었다. 코로나 팬데믹 때는 치료제로 주목받은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빠르게 보급했다. 말라리아 치료제로 쓰던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이 시플라 주력 약품 중 하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빈민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질병이 창궐할 때마다 유수프와 시플라는 어김없이 구세주가 됐다.

    제약사들의 '가격 담합 시대' 끝내다 

    유수프와 시플라의 방식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인도는 2005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특허·지식재산권 등에서 국제 기준을 받아들였다. 시플라는 글로벌 제약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해 대부분의 약물을 제조하게 됐지만, 여전히 훨씬 싼 가격에 보급한다. 가디언은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소수 제약사가 담합해 모든 가격을 결정하는 시대를 끝냈다는 것"이라며 "거대 제약사와 벌인 싸움에서 성공적으로 승리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했다. 시플라가 개척한 제네릭 산업이 급성장하며 다국적 제약사들은 가격을 무작정 높일 수 없게 됐다. 유수프는 "나는 특허가 아닌 독점에 반대하는 삶을 살았다"고 했다.

    올해 기준 자산 24억달러를 보유한 재벌 2세지만 빈부 격차가 극심한 인도에서조차 유수프를 비판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무료 암 병원과 요양 병원을 세웠고 빈민 구제와 학교 건립에도 앞장섰다. 포브스는 2012년 그를 '올해의 의식 있는 자본가'로 꼽았다. 자신을 있게 한 케임브리지대에도 막대한 기부로 은혜를 갚았다. 케임브리지대 화학과는 2020년 케임브리지대 유수프 하미드 화학과가 됐다. 영화 같은 삶에 대해 왜 자서전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플라가 내 삶이었다. 시플라 사사(社史)면 충분하다." 그가 물러난 뒤 그의 후계자들은 가족 지분 전체를 미국 사모펀드 블랙스톤에 넘기는 협상을 벌이고 있다. 그가 평생을 바친 시플라도 그의 황혼처럼 저물어가고 있다.

    ☞제네릭(generic) 의약품

    오리지널 의약품의 성분을 복제해 만든 약. 형태(제형)나 복용 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약효 동등성이나 안전성은 본래 약과 같다. 완성품을 분석해 설계법이나 원리를 찾아내는 리버스 엔지니어링(역공학)을 활용한다. 특허 기간이 끝난 약이 주 대상이다.

    [그래픽] 유수프 하미드
    기고자 : 박건형 테크부장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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