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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행동대장' 전락한 공기업

    조재희 기자 정순우 기자

    발행일 : 2023.11.06 / 종합 A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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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약·민원 해결사 자처… 사업성 외면, 세금으로 손실 메워

    경남 양산시 사송 지구에 들어선 공공 임대주택 '신혼희망타운'은 작년 12월 입주 시작 후 6개월이 지났지만 75%(396가구 중 295가구)가 비어 있었다. 워낙 공실률이 높아 지난 8월 입주 자격에서 자산·소득 요건까지 없앴지만 지금도 24%(96가구)가 빈집이다.

    당초 이 지역은 지하철역조차 버스로 30분 거리여서 2030 실수요자들의 외면이 불을 보듯 뻔한 입지였다.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신혼희망타운' 10만가구 공급에 맞춰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강행했다. 투입된 건설비만 600억원이 넘는다. 업체 관계자는 "민간이라면 이 정도 공실률이면, 담당자는 벌써 문책당하고, 중소 건설사는 도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행복주택'도 비슷했다. 2013년 박 정부는 "2017년까지 전국에 20만가구를 공급하겠다"고 했지만, 2015년 10월부터 2017년 6월까지 입주를 마친 4857가구 중 31%(1528가구)는 미분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현재 비어 있는 LH 임대주택은 4만3000여 채. 한 채당 평균 건설 비용인 2억원을 곱하면 8조6000억원이 투자 후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유지·보수비는 빠져 있다.

    LH의 임대주택 사업은 수익이 아닌 주거 복지라는 목적도 있는 만큼 어느 정도 손실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LH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의 목표에 맞춰 무리하게 사업을 수행하면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LH의 총부채(지난해 말 기준)는 147조원에 달한다.

    이런 악순환은 LH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기업들은 정치권 공약이나 민원을 해결하는 '행동 대장'을 자처하면서 사업성을 외면한 채 '엉터리 사업'을 추진해 천문학적 손실을 보고 있다. 그럼에도 공기업들은 정권의 코드만 맞춰가며 성과급 잔치를 벌이고, 사업 담당자들은 승진까지 한다. 정권이 바뀌면, 또 입맛에 맞는 사업들을 벌이며 살아남는다. 그렇게 쌓인 적자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혈세로 메우는 상황이다.

    한국동서발전은 2020년 152억원을 투입한 칠레 태양광 사업이 3년 연속 적자를 보자 올 7월 매각하기로 했다. 매달 부채 이자만 2000억원을 내고 있는 한전이 지난 정권에서 참여한 중국 네이멍구·랴오닝성·간쑤성 풍력 사업은 자본 잠식 상태에 빠졌다. 한국서부발전의 호주 배너턴 태양광은 일사량 감소로 3년 동안 적자이고, 개발비에만 31억원을 쓴 안면도 병술만 태양광 사업은 사업 허가가 나오지 않으며 무산됐다. 이전 정부가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확대에 드라이브를 걸자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손을 댔다가 벌어진 참사들이다. 한 민간 발전업체 관계자는 "사업 보고서를 보면 상당수 사업이 애초부터 연 7% 이익을 노리고 연 6%로 자금을 조달한 경우도 있더라"며 "민간이었으면 이 같은 말도 안 되는 투자를 결정한 임원들은 징계를 받았거나 감사 대상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의 '행동 대장' 자처

    자본 잠식 상태였던 한국석유공사는 2018년부터 1000억원을 들여 동해가스전에 200㎿(메가와트)급 해상 풍력 발전 사업을 추진 중이다. 위치가 석유공사가 생산했던 동해가스전이라는 점만 빼면 석유공사의 경험, 기술과 거의 무관한 사업이지만, 2025년 공사를 시작해 2027년부터 가동하겠다는 목표로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 사업은 송철호 전 울산시장이 제2의 조선업으로 키우겠다며 드라이브를 건 '부유식 해상 풍력 발전 사업' 중 하나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2021년 울산을 찾아 이 사업에 힘을 실었다. 경제성 논란은 물론 성공 가능성에 의문도 제기된 사업이지만 석유공사는 2021년 국책 연구소가 평가한 연 수익률 9%를 근거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해상 풍력은 자금도 많이 들고 성공 확률도 낮은데 이만한 수익률을 보고 자본 잠식 상태인 회사가 뛰어드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책 실패 뒤치다꺼리까지 떠안아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 보증금 반환 보증보험은 정권의 정책 실패를 감추려는 시도에 공기업이 동원된 사례다. 2020년 8월 도입된 임대차 3법의 부작용으로 '깡통 전세'가 속출하면서 보증금을 떼일 수 있다는 우려가 비등해지자, 정부는 그해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한시적으로 HUG의 보증보험 수수료를 70~80% 인하했다. 일시적으로 세입자들의 불만을 가라앉히려 한 정책이었지만, 그 결과 보증보험 가입액은 2020년 37조2595억원에서 2021년 51조5508억원으로 폭증했다. 이렇게 늘어난 보증보험은 거꾸로 '무자본 갭투자'를 통한 전세 사기의 바탕이 됐고, 결국 작년 하반기부터 보증 사고까지 급증하고 있다. 올해부터 2025년까지 3년간 HUG가 대신 갚아줘야 할 보증금은 8조원으로 추산된다. 나중에 경·공매를 통해 회수하더라도 회수율이 70~80%에 불과해 최소 2조원 손실은 불가피하다.

    ◇"정권 바뀌어도 대마불사"

    회사에 큰 손실을 입히는 잘못된 결정이 내려졌지만, 공기업 특유의 강한 연공서열과 온정주의, 불투명한 의사 결정 때문에 책임을 묻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코드를 맞춘 덕에 해당 정권에서 승진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정년은 보장된다. 민간에서는 IMF 외환 위기를 거치며 진작에 사라진 '대마불사' 신화가 공기업에서는 여전히 작동하다 보니 그 누구도 잘못에 책임을 지지 않고,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는 지적이다.

    구조 조정조차 제때 못 하고 있다. 한국전력은 2021년 이후 올 상반기까지 47조원에 이르는 누적 적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자구안의 적정성은 물론 그마저도 집행은 거의 안 되고 있다. 한전의 최근 마지막 희망퇴직은 14년 전인 2009년이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결국에는 정부와 정치권이 자신들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큰 사건이 터져도 위기의식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올해 철근 누락 사태 당시 LH 내부서도 비슷한 얘기들이 나왔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LH의 경우 일부 조직이 바뀌고 업무가 달라질 수는 있어도 잘리는 경우는 없다고 확신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조준모 성균관대 교수는 "낙하산 경영진과 노조가 손을 잡고 고인 물로 썩어가는데 혈세가 투입되고 있는 것"이라며 "부패가 더 큰 폭탄이 되기 전에 국민과 소비자가 경각심을 갖고 감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 급증하는 공공기관 부채 규모

    [그래픽] 자본 잠식에도 부유식 해상풍력 추진하는 석유공사 / 에너지 공기업 해외 신재생 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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