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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타국에서의 일 년

    이영관 기자

    발행일 : 2023.11.04 / Books A1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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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래 지음 |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 | 700쪽 | 2만2000원

    허기를 느끼는 인간에겐 두 선택지가 있다. 만족할 때까지 채우거나, 다른 무언가로 배고픔을 잊거나…. 하지만 이런 선택에 빠질 때 놓치게 되는 질문이 있다. 풍요로운 이 시대에, 왜 우리는 끝없이 허기를 느끼는 걸까. 스탠퍼드대 문예창작과 교수인 재미 교포 작가 이창래가 9년 만에 낸 장편소설은 이런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미국에서 펜·헤밍웨이 문학상(1996)을 비롯한 숱한 문학상을 받았고, 해외 문단에서 오랫동안 큰 주목을 받은 작가다. '영원한 이방인' 등 작품에서 위안부·한국전쟁을 비롯해 한국적 소재에 천착한 그를 아는 독자라면, 여섯 번째 장편 '타국에서의 일 년'이 생소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펼치면 마치 음식이 목구멍을 오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바쁘게 책장을 넘기는 자신을 분명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삶은 웅장한 뷔페? 영광스러운 동시에 비참한 곳"

    소설은 20대 청년 '틸러 바드먼'의 목소리를 통해 현대인들이 지닌 허기의 근원을 파고든다. 그는 대기업 관리직 아버지 덕분에 미국 부유한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으나, '특별한 허기'를 지니고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출한 탓에 시작된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버지와의 관계 역시 피상적이다. 아버지는 겉으론 아들을 아끼지만, 아들이 1년 동안 해외 연수 대신 낯선 곳을 떠돌다 돌아와도 모른다.

    이야기를 이끄는 또 하나의 설정은, 틸러가 예민한 미각을 지녔다는 것. 우연히 만난 중국계 사업가 '퐁 로우'는 그의 미각을 높이 평가해, 자신의 음식 사업에 끌어들인다. 딱히 속할 곳 없던 틸러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영원히 음미하고 있다"고 느낀 퐁에게 애착을 갖고, 그를 따라 해외에 간다. 하와이, 중국 등을 1년간 떠돌며 펼치는 미각의 세계는 썩 유쾌하지 않다. 의지와 관계 없이 수많은 음식을 먹고, 토해야만 하는 노예적 상황이다. 틸러는 그때를 "삶이라는 웅장한 뷔페"에 비유하며 "나는 그 뷔페가 그토록 영광스러운 동시에 비참한 곳, 영웅적인 동시에 슬픈 곳인지 몰랐다"고 한다.

    책이 술술 읽히는 지점은, '타국에서의 일 년'을 제대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 데 있다. 소설은 틸러가 노예적 상황에서 탈출해, 30대 여성 '밸'과 그의 아들 '빅터 주니어'와 함께 사는 시점에서 전개된다. 새 가정을 꾸린 현재의 이야기와 타국을 여행했던 과거 이야기가 교차되는 식. 두 시점 모두에서 틸러는 어른이라기보다는 '소년'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밸과 빅터 주니어에게 책임 있는 자세로 다가서지 못한다. 인간을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시켜야 한다는 통념과 달리, 작가는 이야기에서 그 경험의 영향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연옥에 살아… 그럼에도 나아간다"

    소설 전반에서 결핍의 상태는 '열쇠'에 비유된다. 자신이 어디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틸러는 점차 타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깨닫는다. "정말로 원한다면, 우리는 모두 마스터키 아닌가?". 그리고 해외에서 타인들의 결핍을 맛보고 토한 끝엔 자신의 결핍을 비로소 바라보게 된다. "(어린 시절의) 그 동굴은 훨씬 더 춥고 거대한 의문의 극장으로 진입하기 위한 로비일 뿐이다. 그래서 펜 라이트를 서둘러 꺼버리게 된다". 허기를 느끼고 배를 채우는 데 급급했던 소년이, 왜 자신이 허기를 느끼는지 스스로 감각해 나가는 과정인 셈이다.

    소설은 미국의 20대 청년 이야기지만, 개인과 가족이란 보편적 주제에 맞닿아 있다. "우리가 각자의 연옥을 짓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연옥 같은 여러 공간으로 통하는 열쇠를 쥐게 될 게 누구보다 분명한 빅터 주니어"라고 생각하는 틸러는 끝끝내 자신만의 진정한 가족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 어떤 경험이 뚜렷하게 그를 변화시켰다기보다는, 오랜 시간 누적된 감각이 그를 달라지게 만들었으리라.

    흥미로운 점은, '이창래'의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는 것. 28세에 첫 소설을 발표한 이후 역사와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목소리를 내 온 작가가, 55세에 이르러 처음 20대 청년의 목소리를 썼다. 그 뜻 역시 불분명하나, 틸러를 역경에 밀어넣은 퐁의 말에서 짐짓 생각하게 된다. "난 그냥 너한테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결핍을 지녔음을 그저 보여주려던 건 아닐까. 틸러는 700쪽에 걸친 사유 끝에 깨닫는다. "우리는 절반쯤 되는 지점에서 우리의 길을 찾을 뿐 그곳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계속 나아간다. 눈을 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준비된 채로."
    기고자 : 이영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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