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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농지 개혁

    이환병 관악고 교감

    발행일 : 2023.11.02 / 특집 A2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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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작지 17억평 매입해 농민에게 분배… 공산화 막았어요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6·25전쟁이라는 어려움 속에서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이뤘습니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 진입하기도 했죠.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에 성공한 이유를 분석하고 배우려는 나라가 많습니다. 국내외 학자들은 그 배경으로 농지 개혁을 많이 이야기해요. 1950년대 실시된 농지 개혁은 우리나라 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북한의 토지 개혁과 문제점

    교과서에는 과거 농민이 가난하고 살기 어려웠다고 서술돼 있어요. 왜 그럴까 궁금하죠. 가장 중요한 원인은 지주전호(소작)제입니다. 전호는 자기 소유 땅이 없어 지주에게 임대해 농사짓는 농민을 말하고, 흔히 소작 농민이라고 불러요. 소작 농민은 농지를 임대한 대가로 수확량 50% 정도를 지주에게 냈고, 이것을 지대(소작료)라고 해요. 통일신라 시대부터 지주전호제는 계속 발전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정점에 이르죠. 소작료도 거의 70%까지 올랐어요.

    광복 직전 모든 독립운동 세력은 '지주전호제를 개혁해 농민에게 토지를 재분배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고 1946년 3월 5일 소련 군정하에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을 발표해 토지 개혁을 단행했어요. 이 법령의 핵심은 몰수와 분배 규정입니다. 토지를 5정보(1정보는 3000평·9917㎡) 이상 소유한 지주에게서 농지·대지·산림 등을 무상으로 몰수해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에게 분배했어요. 분배할 때는 공정성과 균등성을 보장하기 위해 노동력에 따라 점수를 주고, 그 점수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는 방식을 택했어요. 점수 배분 원칙을 보면 18~60세 남자 1점, 18~50세 여자 1점, 15~17세 청년 남녀 0.7점, 10~14세 남녀 어린이 0.4점, 9세 이하 남녀 0.1점, 61세 이상 남자 노인 0.3점, 51세 이상 여자 노인 0.3점이었어요. 농민이 분배받은 토지 면적은 가족의 노동력에 따라 달라졌겠지요.

    북한에서 토지 개혁은 광복 이후 전격적으로, 아주 빠르게 실시됐어요. 그 결과 농민을 가난으로 몰아넣었던, 그리고 1000년 이상 지속됐던 지주전호제가 북한에서 해체됐어요. 토지 개혁을 추진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김일성 세력은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북한의 토지 개혁은 여러 문제점이 있었어요. 농민에게 분배된 토지는 경작권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6·25 전쟁 후에는 협동농장제가 실시돼 농민은 자기 소유 땅을 갖지 못했죠. 농민은 농사를 지은 다음 정부에 생산물 25~30%를 내야 했어요.

    가장 큰 문제점은 토지 개혁이 남북 분단의 원인이 됐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의 토지 개혁 후 남북한의 경제 체제가 서로 달라졌고, 38선으로 생겨난 정치·군사적 분단 다음으로 경제적 분단을 초래했어요.

    남한은 유상 매입, 유상 분배로 농지 개혁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토지 개혁의 성과를 체제 선전에 활용했고, 남한은 정치·사회적으로 더 불안해졌습니다. 당연히 미 군정과 각 정치 세력은 지주전호제 개혁을 뒤로 미룰 수 없게 됐어요. 먼저 미군정은 신한공사를 설립해 일본인이 남기고 간 농지 약 20만 정보를 분배했어요. 지주들은 농지 분배에 대비해 소유한 토지를 시세보다 저렴하게 팔아넘겼는데, 이것을 '토지 방매'라 부르고 그 면적은 약 70만 정보에 달했어요.

    1948년 7월 제정한 제헌 헌법에는 농지 개혁과 친일파 청산을 명시했습니다. 친일파 청산은 제헌의회가 주도했고, 농지 개혁은 이승만 정부가 주도했어요. 정부는 1949년 농지개혁법을 제정하고 유상 매입, 유상 분배 원칙에 따라 농지 개혁을 단행했어요. 정부는 지주가 소유한 3정보 이상 농지(논과 밭)를 매입하고, 이를 소작 농민과 토지가 적은 농민에게 분배했어요. 정부가 매입한 토지 가격은 평년작(풍작도 흉작도 아닌 보통 정도로 된 농사)의 150%였고, 정부는 땅값을 지주에게 지가증권으로 지급했어요.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농사를 지어 5년 동안 생산물 25~30% 정도를 정부에 냈어요. 농지 개혁 시행 결과 소작지 58만여 정보가 매입돼 분배됐어요.

    남한의 농지 개혁은 속도는 느렸으나 6·25전쟁 이전 분배가 거의 완료돼 북한과 마찬가지로 지주전호제가 해체됐어요. 1945년에는 농민 자작 농지 비율이 약 35% 정도였는데, 농지 개혁 후 1950년에는 약 88%로 증가했어요. 대부분 농민이 자기 소유 땅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꿈이 실현된 거죠. 정부는 자작농을 중심으로 다양한 증산(增産) 정책을 시행하고 '임시토지수득세'를 징수했어요. 임시토지수득세는 농업 생산물에 대한 조세를 현금 대신 현물(곡식)로 받는 제도였는데, 전쟁 전후 곡물 가격 안정과 군사용 식량 공급에 큰 도움이 됐어요.

    김일성 정권은 6·25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후 한강 이남 지역으로의 공격을 서두르지 않았어요. 당시 북한 정권에 참여한 박헌영 등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면 농민 봉기가 일어나 자연스럽게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될 것이라고 주장했어요. 그러나 한강 이남 지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 이유는 이미 농민이 농지를 분배받아 사상적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주는 토지 방매를 통해 얻은 수입에 더해 지가증권 등으로 일본이 남기고 간 귀속 재산을 불하받아 산업자본가로 성장했어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산업자본가의 역할이 중요한데, 정부의 유상 매입 원칙이 산업자본가 형성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어요. 또 일부 지주는 토지 방매 대신 사학 재단을 만들어 중등학교와 대학을 설립했어요. 이후 사립학교가 중등 이상 교육을 상당 부분 담당하는 배경이 됐죠.

    미 군정의 농지 분배, 지주의 토지 방매, 정부의 농지 개혁은 자작농제 성립, 산업자본가 성장, 교육 기반 확립 등의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또 북한 정권의 사상적 공세를 차단해 자유민주주의 신념을 확고하게 유지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고자 : 이환병 관악고 교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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