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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디자인·건축 이야기] 얀 치홀트

    전종현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

    발행일 : 2023.09.19 / 특집 A2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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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자 크기·기호·색깔 가짓수 제한해 현대 타이포그래피의 원형 정립했죠

    올여름 영화 '오펜하이머'가 화제였습니다. 원자폭탄을 만든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예요. 원자폭탄을 만든 핵심 인물 상당수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이들이었어요. 당시 독일에서 탈출한 사람 중 일부는 중립국 스위스로 갔답니다. 이들 중에는 전설적인 타이포그래퍼이자 북 디자이너인 얀 치홀트(사진·Jan Tschichold·1902~1974)가 있었습니다.

    타이포그래피는 그래픽 디자인에서 글자의 서체나 배치 등을 구성하고 표현하는 일을 말합니다. 서체 디자인, 손으로 글자를 그리는 레터링과 캘리그래피, 텍스트의 행간·자간 조절, 이미지와 함께 평면에 배치하는 일까지 글자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다루죠. 현대 타이포그래피의 원형을 제시한 얀 치홀트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타이포그래퍼로 꼽혀요.

    얀 치홀트는 '인쇄 도시'로 유명한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대학을 마치고 타이포그래피에 빠졌어요. 1923년 혁신적인 디자인 교육 기관 '바우하우스'의 전시회에 갔다가 인생이 바뀌었어요. 듣도 보도 못 한 새로운 그래픽 작업 때문이었죠. 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장식을 기하학적 도형으로 단순화하고, 비대칭적인 배치를 통해 역동적인 화면을 구성했어요. 또 글자 끝에 돌기가 있는 세리프(명조) 대신 돌기가 없는 산세리프(고딕) 서체를 활용한 급진적 모습에 그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이후 동시대 타이포그래피의 변화를 계속 추적하던 그는 1925년 독일인쇄교육연합저널에 장편의 글을 기고해요. "과거는 죽었다"는 선언과 함께 당시 업계에 만연했던 불필요한 장식을 몰아내자고 주장했죠. 그러면서 객관성과 간결성, 논리성을 강조한 타이포그래피 예시를 설명했어요. 그는 산세리프 서체를 옹호하고, 선과 기호의 한정적 사용, 비대칭적인 배치 등 방법을 활용했어요. 그의 주장은 독일어권 인쇄업에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얀 치홀트는 1928년 디자이너를 위한 이론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를 출간해 '신타이포그래피' 운동의 핵심으로 떠오릅니다. 그가 중시한 명쾌함, 정보 구조의 논리적 흐름, 활자 크기·기호·색깔의 가짓수를 제한하는 경제적이고 간결한 표현, 여백의 적극적 활용은 현대 타이포그래피의 원형이 됐습니다.

    그런데 1933년 나치의 박해로 스위스 바젤로 망명한 그에게 변곡점이 찾아옵니다. 과거를 배척하고 새로움을 강조하는 신타이포그래피에서 나치의 파시즘을 발견한 거예요. 결국 고전 타이포그래피로 회귀한 그는 수많은 추종자에게 비난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는 변절이 아니라 목표 변경에 가까웠어요. 효과적인 의사 전달과 가독성을 위해 고전 타이포그래피가 간직한 세리프체와 대칭성의 전통에 자신이 중시하던 비대칭성과 논리적 정보 구조를 엮었죠.

    그는 1947년부터 2년간 영국 출판사 '펭귄 북스'를 위한 규정집을 만듭니다. 책의 판형과 제목 위치, 편집과 인쇄 방식에 대한 표준을 제시했어요. 1967년 발표한 서체 '사봉(Sabon)'은 높은 완성도에 뛰어난 가독성과 경제성까지 갖춰 미국 성경과 패션 잡지 '보그'의 본문에 쓰였습니다.
    기고자 : 전종현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536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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