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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그라운드 제로'에서 본 미국의 힘

    윤주헌 뉴욕 특파원

    발행일 : 2023.09.18 / 여론/독자 A34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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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난 뒤 미국은 세계무역센터(WTC)가 있던 곳을 거대한 추모의 공간으로 만들고 '그라운드 제로'라고 이름을 붙였다. 2977명 희생자 이름이 검은색 돌판에 깨알같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매년 이곳에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식이 열리고 올해 22번째 행사가 열렸다. 테러리스트들에게 탈취당한 항공기가 무역센터에 처음 부딪친 오전 8시 46분 조종(弔鐘)이 울리며 시작된다고 사전에 공지가 있었다. 그러나 오전 7시부터 수백 명이 휠체어를 타고, 지팡이를 짚고,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모여들었다.

    행사 시작 전, 무대에서 오른쪽 대각선으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섰다. 그 주변으로 캐시 호컬 뉴욕 주지사, 에릭 애덤스 뉴욕시장이 자리했다. 모두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민주당 소속이다. 이들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공화당 대선 주자 후보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아내와 함께 도착했다. 9·11 테러 당시 뉴욕시장으로 리더십을 발휘해 사태를 수습했다는 평가를 받는 루디 줄리아니 전 시장도 있었다. 그는 현재 2020년 대선 때 트럼프 전 대통령 투표 조작을 도운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9·11은 공화당 소속인 부시 행정부에서 벌어졌지만, 책임 소재를 두고 정치권에서 정쟁(政爭)을 벌이거나 지지자들이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한 적은 없다. 그들이 싸울 줄 몰라서가 아니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맨해튼 남부 지검 앞에서는 올해 초 트럼프가 기소된 '포르노 여배우 입막음 사건'을 두고 양당 지지자들이 몸싸움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하지만 9·11이라는 국가적 재난 앞에선 정치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이날 참석한 공화당 정치인들도 다른 사람과 같은 추모객일 뿐이었다.

    정쟁 대신 미국인들이 선택한 것은 서로를 향한 진심 어린 위로와 국가를 향한 애국심으로 서로를 보듬는 일이었다. 테러로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이 눈물을 흘리면 옆 사람이 손수건을 건넸고, 흐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어깨를 감쌌다. 이날 단상에 오른 유족들은 목멘 상태로 "가족을 앗아가는 슬픔은 지금도 엄청난 고통을 주고 있지만, 우리는 그 어떤 공격에도 단호히 맞서 일어설 것"이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추모식은 단합의 장이었고 회복의 공간이었고 미국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장소였다.

    미국의 부통령, 유력 대선 후보 등은 몇 시간 동안 구두를 신고 묵묵히 서 있다가 자리를 떴다. 추모식은 2977명의 이름을 5시간 동안 하나하나 다 부르고 나서야 끝났다. 유족들은 자리를 정돈하고 그라운드 제로에 있는 자기 가족의 이름을 만지며 조화를 놓았다. 테러가 벌어진 지 22년이 지나도 여전히 굳건한 미국을 만드는 이들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기고자 : 윤주헌 뉴욕 특파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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