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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한은형 소설가

    발행일 : 2023.09.14 / 여론/독자 A33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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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이 무서워서 미국에 가고 싶지 않다던 사람이 말했다. 이제 한국도 미국이 되었네. 뭐라고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사람이 다쳤고, 죽었다. 다치거나 죽지 않았어도 그곳에 있던 사람도 있다. 몸이 다치지 않았다고 다치지 않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쇼핑몰에서, 산책로에서, 사무실 밀집지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서 느낀 가장 큰 감정은 무력감이었다.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어떤 실수도 하지 않았는데 죽을 수 있다니. 이런 공포심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아니다.

    칼, 너클, 흉기, 괴한, 난동, 무차별, 범죄라는 단어로 무한 재생산되는 뉴스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들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무차별 범죄 때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 행동 강령으로 공유된다는 것이었다. 몸을 지키는 방법부터 흉기에 찔렸을 때 지혈하는 법까지. 행동 강령은 소셜미디어를 흘러다니다 인터넷 뉴스, 전통적 미디어까지 모두 점령했다. '무차별 흉기 난동 대처 방법'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었다. 기자로 보이는 사람은 행동 강령을 시연하기까지 했다. 정색하고, 매우 진지하게 말이다.

    호신용품을 장만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샀다는 사람도 보았고, 후추 스프레이나 삼단봉 같은 호신용품이 품절되었다는 뉴스도 들었다. 호신용품이 포털의 쇼핑 사이트에서 검색도 구매도 1위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가스총을 파는 사이트에 들어가 구매평을 읽어보았다. 사용법이 간단해 호신용으로 좋을 것 같다거나 험한 요즘 세상에 꼭 들고 다녀야 하는 필수품이라는 후기를 봤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호신용품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괴한이 달려오는 속도가 호신용품을 꺼내는 시간보다 빠르고, 괴한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흉기를 든 괴한과 마주쳤을 때는 가능한 한 멀리 뛰어 도망가라고 했다. 달리기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며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효과적으로 달리는 방법도 알려줬다. 상체, 팔, 무릎, 발을 나눠 포인트를 짚어주면서. 첫째, 무게중심은 앞으로 약 10도에서 15도 기울여 유지한다. 둘째, 팔꿈치는 90도를 만들어 앞뒤로 크게 흔든다. 셋째, 무릎은 최대한 높이 들어올린다. 넷째, 앞꿈치가 먼저 바닥에 닿게 한다. 전문가가 말하는 전력 질주 자세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나는 이 말을 생각하고 있다. 헝가리 속담이라는 이 말을 동명의 일본 드라마를 보다가 알게 되었다. 'Sz?gyen a fut?s, de hasznos.' 어떻게 읽는지 모르는 이 헝가리 속담을 번역기에서 영어로 바꾸었더니 이랬다. 'Running away is shameful, but useful.'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의역일 줄 알았던 드라마 제목은 올곧은 직역이었다. 평소 같으면 신경 쓰지 않을 말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헝가리 속담이나 일본 드라마에서 '도망'은 내가 요즘 생각하는 '달리기'와는 다른 것 같다. 달리지 않아서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부끄러움의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달려야 살 수 있다.

    제목 때문에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드라마 이야기를 한 건 아니다. 제목 때문에 보게 된 이 드라마는 나를 어떻게 지킬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회에 나오면서 사람들은 상처를 입게 되는데, 어떤 상처는 흉터로 남고 또 어떤 상처는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는 남자 주인공 이야기는 울림이 있었다. 나에게만 울림이 있던 건 아닌지, 2016년에 방영한 이 드라마는 열렬한 반응을 얻어 20%가 넘는 시청률로 종영했다. 사회가 정한 규칙이 아닌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고난을 헤쳐 나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손쉽게는 '각자도생'이라고 요약할 수도 있겠다.

    이번에도 살아남기 위해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체념과 허무가 깔려있어 어느 정도 심드렁하게 느꼈던 각자도생이 새롭게 다가왔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말이 이렇게나 긴박하고 냉랭한 말이었나. '각자' 알아서 '도'주하라는 말로도 들린다. 2023년의 각자도생에는 공포와 비장함이 서려 있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이토록 심란한 말인 줄 미처 몰랐다.
    기고자 : 한은형 소설가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2101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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