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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스마트폰 해킹 당하고 바보 되는 방법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발행일 : 2023.09.12 / 여론/독자 A33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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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토요일 오후 전(前) 권투 세계 챔피언에게 "좋은 오후에요" 하고 문자가 왔다. 그와는 인터뷰하면서 단 한 번 만났을 뿐이고 그것도 10년 훌쩍 지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문자를 보내지 말란 법은 없지만 토요일 오후에 좋은 오후라는 평범한 인사 문자를 10여 년 만에 받는 건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그 글귀가 '좋은 오후예요'가 아니라 '좋은 오후에요'인 것이 조금 신경 쓰였다. 맞춤법 틀리는 문자를 받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 문자는 텔레그램으로 왔는데 텔레그램이란 대화 앱은 보안성이 높다기에 깔아뒀을 뿐 쓰지도 않는 앱이었다. 마지막으로 텔레그램을 주고받은 게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덮어두었다. 챔피언은 내 어릴 적 우상이었고, 그는 체육관 벽에 '엄마 대한국민 만세다'라고 쓴 액자를 걸어뒀다. 역시 대단한 사람이군 하고 나는 생각했었다. 어쩌면 응당 "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하고 대답해야 했는지도 모르지만 잠자코 챔피언의 다음 문자를 기다렸다. 설마 "권투 해보지 않겠느냐" 같은 건 아니겠지 하면서.

    이윽고 다른 문자가 왔다. 텔레그램에서 보낸 것이었다. 길고도 복잡한 설명이 담긴 그 문자는 뭔가 잘못돼서 계정이 도난당했으니 첨부한 링크에 접속해 보안을 유지하라는 내용이었다. 역시 챔피언이 뜬금없는 안부 문자를 보낼 리 없었다. 낯선 문자에 첨부된 링크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정도의 상식을 갖추고 있던 나는 그 문자를 바로 지워버렸다.

    챔피언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똑같은 안부 문자를 보냈고 텔레그램에서도 계속 뭐가 잘못됐으니 시키는 대로 하라는 문자가 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텔레그램의 선의(善意)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문자에 첨부된 링크를 눌러 내 번호를 인증하고 보안 절차를 밟았다. 더 이상 수상한 문자는 오지 않았고 내 텔레그램 계정은 한층 안전해진 것 같았다.

    "텔레그램 해킹 당하셨군요" 하는 후배의 문자가 온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 이미 몇 주 전 나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해킹을 당한 그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려줬다. 내 텔레그램에 있는 모든 연락처로 안부 문자가 가고 대답 안 하면 어떻게 지내냐, 요즘 바쁘냐 하며 아는 척을 해서 끝내 상대방의 텔레그램을 해킹한다는 것이었다.

    곧이어 전화와 문자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로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고 지낸 사람들한테 왔다. 10년 전쯤 글쓰기 강의 때 만난 학생에게서 전화가 왔고 만난 지 몇 년 됐는지 가물가물한 후배한테도 문자가 왔다. 어떤 사람은 그 문자에 "오랜만이에요" 하고 답한 뒤 해커와 꽤 길게 대화하다가 무슨 화면을 캡처해서 보내라는 요구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전화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오후예요' 같은 맞춤법을 틀리겠느냐" "몇 년 만에 연락해 그런 걸 왜 보내라고 하겠느냐"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방귀 뀐 놈이 성내고 있음을 깨닫고 바로 사과했다.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의 전화도 받았다. 그는 내가 해킹 당한 사실을 확인하고는 잘 지내느냐고 물었고 자신도 맨날 하던 일을 하며 그럭저럭 잘 지낸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 누구인지 몰라 답답했다.

    텔레그램 연락처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에게서 뜬금없는 안부 문자를 받고 해킹 위험에 처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텔레그램은 저절로 로그아웃됐고 로그인은 계속 거부당했다. 속수(束手)에 무책(無策)이었다.

    결국 다음 날이 돼서야 텔레그램에 로그인할 수 있었다. 내게 연락한 사람보다 몇십 배 많은 사람에게 망할 놈의 문자가 발송된 것을 확인했다. 나는 뒤늦게 텔레그램을 탈퇴하고 그 앱을 파내 버렸지만 이미 아는 사람과 알 듯 말 듯한 사람, 연락처는 있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 민폐 끼친 바보가 된 뒤였다.

    사회생활 시작할 때만 해도 중요 연락처를 인쇄한 종이를 접어 지갑에 넣고 다녔다. 지금 내 휴대폰에는 2400명 넘는 연락처가 저장돼 있다. 그중 내게 꼭 필요한 연락처가 몇이나 될까. 깊은 서랍 속 무의미한 연락처들은 아무 쓸모가 없다가 어느 날 해킹 폭탄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늘도 무슨 앱을 여는데 "연락처에 접근을 허용하시겠습니까" 하는 메시지가 떴다. 그렇게 당하고도 나는 습관적으로 '허용'을 눌렀다. 스마트폰이니까 나를 스마트하게 만들어 주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기고자 :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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