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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다랭이팜 막걸리

    한은형 소설가

    발행일 : 2023.09.09 / 통판 B6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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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의 순도와 애정의 순도는 비례합니까?

    맥주를 액체로 된 빵으로 여긴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빵과 맥주 모두 좋아하는데 빵을 조금 더 좋아한다면서. 빵이 없으면 빵을 먹는 기분으로 빵 대신 맥주를 마신다는 걸 들으니 빵과 맥주가 꽤나 비슷해 보였다. 보리나 밀가루로 만든다는 것도, 구수한 냄새도, 빵빵하게 부풀어오르는 속성도 말이다.

    빵도 좋고, 맥주도 좋다. 그들의 만만함과 느긋함이 좋다. 하지만 '좋다'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 이상의 정서가 없다. 밥과 막걸리는 그렇지 않다. 지긋지긋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찌르르하기도 하고, 뭔가 많은 감정을 준다. '마시는 밥'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빵보다는 밥이고, 맥주보다는 막걸리다.

    밥을 사랑했었다. 갓 한 밥의 냄새와 촉감, 자르르한 윤기와 느슨히 손을 맞대고 있는 쌀의 점착력 같은 생래적 자질을 말이다. 이제 열렬한 시기는 지났다. 매일 먹지도 않고 먹는다고 해도 조금만 먹는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맛있는 음식 중 하나가 쌀밥이다. 여전히 그렇다. 그러니 막걸리에 빠졌던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막걸리를 떠올리면 몸의 어딘가가 찌르르했던 때가 있었다. 마시고 싶어서. 우연히 갔던 막걸리집 때문이었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막걸리가 있었다. 막걸리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장수나 지평 말고도 복순도가 등등의 이런저런 막걸리를 마셔보았지만 거기에는 처음 본 막걸리들이 있었다.

    국산 쌀을 쓰고, 감미료를 넣지 않거나 최소화한 것 위주로 골랐다고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전국의 양조장을 다니며 막걸리를 만드는 공정까지 고려했다며. 이런 말을 들으면 좋아서 현기증이 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나다. 나는 그걸 다 마셔보아야 했다. 어떤 막걸리가 맛있는지, 내 입맛에 맞는지 알아야 했으니까. 100종 정도가 있었다면 그렇게 덤비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만 스무 병 정도라니 얼마나 가뿐한가. 한 번에 서너 병씩 마신다면 곧 모든 막걸리를 섭렵할 수 있다니 의욕이 샘솟았다.

    그때 만난 막걸리 중에 다랭이팜 막걸리가 있다. 마시자마자 '어… 이건 내 스타일인데?'라고 생각했다. 금사빠는 아니다. 첫눈에 이런 생각이 드는 일은 잘 없다. 물건이나, 사람이나, 음식이나. 미적거리는 편인 내가 평소와 달리 행동력 있게 움직일 때는 확신을 주는 무언가를 만났을 때다. 다랭이팜 막걸리를 만난 이후로 다랭이팜 막걸리를 마시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다랭이팜이 보이면 다랭이팜을 마셨고, 양조장에서 주문해서 집에서 마시기 시작했다. 작가 레지던스에 갔을 때도 다랭이팜을 레지던스로 주문해서 다른 작가들과 마셨다.

    다랭이팜의 맛은 한마디로 수퍼 드라이. 드라이하고 산미가 있고 단맛이 없었다. 아니, 다른 막걸리에서 느꼈던 그런 달착지근하고 자연스럽지 않은 단맛 대신 쌀의 단맛이 있었다. 거기에 프루티(fruity)하다고 할 만한 청량한 느낌. 그리고 맑았다. 너무 맑으면 막걸리가 아닌 청주가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이 정밀하게 맑음의 정도를 통제한 맑은 막걸리였다. 걸리적거리지 않고 축축하지도 않은 샘물 같은 막걸리랄까.

    다랭이팜을 마시다가 다랑이 논을 알게 되었다. 산을 깎아 만들었기에 45도인 경사인 이곳은 108개의 층층계단으로 된 논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다랑이 논 앞에는 남해 바다가 있다. 다랭이팜은 땅끝의 막걸리이기도 한 것이다. 다랭이팜을 마시면서 땅끝의 다랑이 논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 여름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다.
    기고자 : 한은형 소설가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720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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