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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감'이 달라진다, 주차장 때문에

    정상혁 기자

    발행일 : 2023.09.09 / 주말섹션 B4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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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호와 반발 교차하는 '★★ 우선 주차 구역'

    월남전 참전 용사 김철종(75)씨는 최근 '하차감'이 무엇인지를 몸소 경험했다. 올해 초 새로 장만한 쏘나타 승용차 때문은 아니었다. 거주지 인근 평창군청에 들렀다가 파란색 페인트로 구획된 '국가유공자 우선 주차 구역'에 차를 대고 내린 직후였다. 지난 5월 건물 초입에 마련된 딱 1면짜리 공간. "그래도 우리나라가 내가 겪은 고생을 잊지 않았구나 싶어 뭉클했다"고 그는 말했다. 1970년부터 2년간 전장(戰場)에 있었고, 이후 평생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흉터 등의 이유로 여름에도 반바지를 입지 못한다는 김씨는 "기존의 이용료 감면 같은 금전적 혜택도 감사한 일이지만 이런 배려야말로 더 확산돼야 할 정책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확산 중이다. 충주시·남양주시 등에 이어, 지난달 서울시도 '국가유공자 우선 주차 구역' 설치 계획을 발표했다. 현재 전국 지자체 17곳이 운영 중이다. 국가보훈부는 지난 2월 '국가유공자 우선 주차 구역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표준 조례(안)'을 마련해 제정을 권고했다. 6·25전쟁 참전 용사 및 4·19혁명 공로자 등 국가유공자들의 주차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경감하고, 자긍심도 고취하겠다는 취지다. 관공서뿐 아니라 백화점 및 대형 할인 마트 등 민간 다중 시설과도 설치를 논의 중이다. 보훈부 측은 "헌신을 예우하는 문화가 일상에 퍼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울컥해서 눈물이 났다"

    경찰로 근무하다 1998년 대관령 폭설 인명 구조 도중 쓰러져 2000년 공상군경(公傷軍警)으로 유공자가 된 이욱환(70)씨는 "얼마 전 주차장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돈 몇 푼보다 중요한 건 후손들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동료들을 데리고 일부러 '국가 유공자 주차' 표지를 구경하러 다녀오기도 했어요. 기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국내 첫 '국가유공자 우선 주차' 구역은 2017년 서울 용산구청에 설치됐다. 구청 지하주차장과 야외 공영주차장에 총 25면. "우리가 누리는 풍요는 이들의 희생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합당한 예우를 보인 것"이라는 설명이다.

    보훈의 가치를 중시하는 기조가 높아지면서, 정부는 '국가유공자용 자동차 번호판' 개발에도 착수했다. 미국은 임무 수행 중 사망한 군인의 유족을 일컫는 '골드스타 패밀리'에게 전용 차량 번호판을 부여하고 주차 공간 제공 등의 혜택을 준다. 캐나다에도 희생의 기억을 의미하는 개양귀비꽃 문양과 '베테랑' 문구를 표기하는 번호판 제도가 있다. 보훈부 관계자는 "연구 용역이 끝나고 내년 이후 도입되면 주차 문화 정착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상징성 있지만, 실효성은?

    지난 1일 오후 5시쯤 용산구청 지하 4층에 마련된 '국가유공자 우선 주차 구역'에 가봤다. 주차장이 만차가 아니었음에도, 5면 중 4면이 차 있었다. 국가유공자 스티커를 부착한 차량은 한 대도 없었다. 40분 뒤 주차돼 있던 흰색 아반떼 차주가 등장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 국가유공자는 아니었다. 왜 여기에 주차했느냐고 물었더니 "(전용이 아닌) 우선 주차 아니냐"고 했다. 뭐가 문제냐는 대꾸였다. 10분 뒤 검은색 그랜저 차량이 나타나더니 곧장 해당 빈자리에 차를 댔다. 차에서 내린 운전자에게 "혹시 국가유공자시냐"고 물었더니 "아닌데요" 대답하곤 쌩 지나갔다.

    비(非)국가유공자가 주차해도 제재 근거는 없다. 어디까지나 배려에 기반한 '우선'이니까. 과태료를 물릴 수도 없고, 그저 이동 주차를 권고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용 현황에 대한 정확한 체크도 어렵다. 자칫 유명무실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손희원 회장은 "환영할 만한 제도지만 아무나 사용한다면 실질적인 효과는 없는 셈"이라며 "장애인 주차 구역처럼 적극적인 조치를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좁아터진 땅, 매일 발생하는 주차 전쟁을 고려하면 '전용 구역' 지정도 무리가 있다. 현실적 여건과 반발 때문이다. 한 시민은 "고령으로 차량 이용을 못하는 분들이 더 많을 텐데 보여주기식 정책 아니냐"며 "차라리 '장애인 주차 구역'을 국가유공자가 겸용하게끔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다. 평균 연령 71세, 국가유공자 중에는 장애 등급은 받지 못했으나 거동이 여의치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국가유공자 우선 주차 구역'은 일반 주차 구역과 면적이 동일해 하차 시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보훈부 측은 "개선점을 찾아나가겠다"고 했다.

    여성? 어르신? 누가 먼저인가

    '우선 주차 구역'은 해당 대상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드러내는 지표다. 그러나 신중한 대상 선정과 당위성에 대한 합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쓸데없는 것 자꾸 만들어 갈등 유발하지 말라"는 온라인 댓글은 그 증거다. 이미 '여성' '어르신' '임산부' 등 다종의 우선 구역이 존재하는 상황. 이달부터 강릉시청이 시범 운영에 들어간 '어르신·임산부 우선 주차 구역'처럼 아예 둘을 합쳐버린 혼종도 있다. 강릉시청 관계자는 "누가 더 먼저인지 구분 짓기보다 포괄적으로 배려하자는 의미"라고 말했다.

    지난겨울 경기도 고양시 한 쇼핑몰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여성 우선 주차 구역'에 한 여성이 자리를 맡아둔다며 차 없이 서 있었고, 한 남성 운전자가 그 자리에 차를 대려 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여기) 여성 주차장이에요." "우대인 거지 전용이 아니에요." '여성 우선 주차 구역'은 가장 뜨거운 갈등의 영토다. 여성 안전 확보를 목적으로 2009년 서울시가 처음 도입했지만, 용어로 인한 혼란과 홍보 미숙으로 잇단 다툼을 야기했고, 여성을 운전 약자로 특정 짓는다는 성차별 논란도 벌어졌다. 실제 여성이 이용하는 비율은 16% 수준이었다. 그러자 최근 서울시는 이 구역을 없애고, 임산부나 영·유아 등 동반 차량을 위한 '가족 우선 주차 구역'으로 바꾸기로 했다.

    시민 의식 함양이 먼저

    배려는 강제되지 않는다. 미국 전역의 주차장에서는 '참전 용사 주차 전용(Veteran Parking Only)' 표지판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당신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같은 문구가 기재돼 있다. 희생에 대한 예우가 깍듯하기로 유명한 나라답게 공공 시설뿐 아니라 은행·마트 등이 자발적으로 설치하기도 한다. 한국의 '국가유공자 우선 주차 구역' 역시 미국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월남전 참전 용사의 주차 위반 건을 다룬 로드아일랜드주 법원 프랭크 카프리오 판사의 2016년 판결은 국가유공자에 대한 미국 사회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베트남에서 얻은 심장 질환으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던 70대 남성 마이클 마시가 100달러짜리 주차 위반 딱지를 받은 후 법정에 출두해 변론하는 장면이다. 유튜브에도 영상이 올라와 있다. "저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재향군인 병원에 갑니다. 그곳은 너무 붐비고 주차 공간은 열악합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좀처럼 병원 내에 주차할 수가 없었습니다…." 곰곰이 듣던 판사는 판결했다. "나라를 위한 당신의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범칙금 부과를 취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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