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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파독 광부와 간호사

    유석재 기자

    발행일 : 2023.09.07 / 특집 A2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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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인당 소득 87달러 시절, 獨서 연 5000만달러 보내

    올해는 '파독(派獨) 광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12월 22일 서독 뒤셀도르프 공항에서 한국인 파독 광부 1진 123명이 처음 독일 땅을 밟았습니다. 그런데 '파독'이 뭘까요? '독일로 파견한다'는 뜻입니다. 그럼 '서독'은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서쪽의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동쪽의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분단됐다가 1990년 다시 통일됐습니다. 동독은 공산주의 국가였고, 우리나라의 우방국은 자유민주 진영인 서독이었죠. 그런데 왜 서독에 우리 광부를 보내야 했을까요?

    서독으로 떠난 '신사 광부'들

    1960년대 초 대한민국 현대사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4·19 혁명이 일어나 대통령 중심제였던 제1공화국이 끝나고 의원내각제의 제2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이 실시되다가 1963년 10월 5대 대통령 선거가 이뤄져 다시 대통령 중심제의 제3공화국이 출범했죠.

    이때 새 정부의 큰 관심사는 가난에서 벗어나 경제 발전을 이루는 동시에 실업난을 해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어요. 1963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겨우 87달러였습니다. 3만달러가 넘는 지금과는 대단히 격차가 컸죠. 인구는 2400만명인데 실업자는 250만명이 넘었고, 종업원 200명 이상 기업은 54곳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인력을 수출한다면 외화를 얻는 동시에 실업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겠죠. 정말 그럴 기회가 생겼습니다. 서독은 전쟁 이후 경제 부흥을 이루는 과정에서 노동력이 부족했습니다. 쉽게 말해 잘사는 나라 사람들이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기피했기 때문이었죠. 이 때문에 외국인 노동력 유입이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1963년 우리나라와 서독 정부는 광부 임시 고용에 대한 협정을 맺었습니다.

    처음에 367명을 뽑은 파독 광부에는 지원자가 2800여 명 몰렸습니다. 중졸 이상, 병역을 마친 남성이라는 조건이었습니다. 매달 600마르크(160달러) 정도의 급여는 당시 국내 직장인 월급 8배나 됐다고 합니다. 신문마다 합격자 명단을 사법시험 합격자처럼 지면에 냈습니다. 합격자 중 대졸자가 18%나 돼 '신사 광부'라고도 불렀는데, 심사에 붙으려고 일부러 연탄 가루를 손에 묻혀 험해 보이게 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합니다.

    한국인 남녀, 힘들고 험한 일 도맡아

    비슷한 시기 많은 우리나라 간호사들도 서독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역시 서독의 간호사 인력 부족 때문이었죠. 1950년대부터 여러 경로로 간호사를 보냈고, 1966년에는 한국해외개발공사가 서독 측과 업무 계약을 맺어 대규모 파견이 진행됐다고 합니다.

    '재독 동포 50년사'(2015)에 따르면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우리나라 정부가 서독에 파견한 광산 근로자는 7936명, 간호사는 1만723명이었습니다. 1970년대 '서독'이란 나라 이름이 나오면 반드시 '우리 광부 아저씨들과 간호사 누나들이 많이 가 있는 곳'이란 설명이 뒤따를 정도였습니다.

    작업 환경은 무척 혹독했습니다. 광부들은 섭씨 30도의 지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한 지하 1000m 작업장에서 50㎏이나 되는 작업 도구를 가지고 들어가 중노동에 시달렸습니다. 먼지와 석탄 가루를 마셔야 했고 까매진 밥으로 허기를 채웠습니다. 골절상은 다반사였고 작업 중 사고로 희생된 사람도 27명이나 됐습니다.

    힘든 업무는 간호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낯선 땅 병원에 도착해서 의사 소통이 제대로 될 리 없었습니다. 병실을 청소하고 환자의 용변을 돕거나 식사 수발을 하는 일도 업무 분담이 이뤄지지 않은 채 한국인 간호사 몫이 됐다고 합니다. 시체를 거즈로 닦는 일까지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고국에서 교육받은 고급 인력이었던 이들이 왜 당시 이역만리 타국으로 떠나 이런 고생을 해야 했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 너무나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한 간호사는 "도대체 우리나라는 언제쯤이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하며 오열했다고 합니다.

    후손을 위한 '번영의 터전'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습니다. 서독에서 차관을 얻고 중화학공업 기술을 전수받고자 함이었습니다. 서독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보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영감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은 12월 10일 함보른 탄광 회사를 방문해 한국인 광부·간호사 350명과 만났습니다.

    당시 통역관 백영훈의 회고에 따르면 강당에서 광부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했는데 "대한사람 대한으로"부터는 흐느끼는 울음소리 때문에 더 이상 노래가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통령은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여기서 연설은 중단됐는데, 장내를 가득 메운 울음소리에 대통령마저 눈시울을 붉혔기 때문이었습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수행원들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은 연설을 이어갔습니다.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본국에 송금한 돈은 연간 약 5000만달러로 한때 우리나라 국민총생산(GNP)의 2%에 이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번 돈을 모두 고국에 보내고 나니 빈손이 돼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낸 돈은 이후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고속 경제성장에 소중한 종잣돈이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기고자 :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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