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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사업, M&A 매일매일이 전쟁… 아버님(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요새 기업했으면 힘드셨을 것

취임 20주년이지만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밝게 웃지 못했다. 최근 현대엘리베이터 2대 주주인 쉰들러 홀딩스와 벌인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한 데다, 쉰들러 측이 현 회장 주식을 강제 압류하려는 등 경영권 공세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그룹의 실질적 지주회사다. 현 회장은 "배상금을 완납했는데도 강제집행을 요구하는 쉰들러는 토종 엘리베이터 기업을 적대적 인수·합병하려는 것"이라며 "모든 방법을 동원해 경영권을 사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아산이 2008년 이후 중단된 대북 사업을 접었다는 일각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취임 직후부터 매일이 전쟁이었다

―2003년 남편 정몽헌 회장의 죽음으로 경영 일선에 뛰어든 지 20년이다.

"처음부터 전쟁터였다. 보람된 일도 있었지만 힘든 일이 훨씬 많았다."

―두 달도 못 버틸 거란 전망이 많았다.

"신경 안 썼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서 일희일비할 시간이 없었다."

―정상영 KCC 회장 등 현대가와 경영권 분쟁도 치렀다.

"남편에게 거대한 빚 상속을 받은 건데 집안 어른들은 내가 경영에 나서는 걸 원하지 않았다. 나도 애들 키우며 편하게 살고 싶었지만 이러다간 남편의 유업이 물거품 될 것 같아 결단을 내렸다."

―1·2위 다투던 현대그룹의 재계 서열은 크게 낮아졌다.

"서열엔 신경 안 쓴다. 2000년대 들어 현대그룹의 분리가 가속화됐고 규모는 축소됐지만 계열사별로 내실을 따지며 주력하는 사업들이 생기고 있다."

―정주영 회장은 섭섭해하지 않을까.

"아버님도 요새 기업했으면 힘드셨을 거다(웃음)."

―뚝심의 경영인으로 평가받더라.

"우리 집이 딸만 넷이다. 어머니(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가 대학원 다니며 강의 다닐 때 외할머니가 날 외가로 데려가셨다. 사업가, 정치인들 드나들던 외가에서 3년간 자라며 내 성격이 둥글둥글하고도 대차졌다고 하더라."

대북 사업, 포기 못 하는 이유

―정몽헌 회장 20주기이기도 하다. 현대아산이 업종을 건설로 변경했다는 뉴스도 나온다.

"남북 경협 사업과 결별하는 일은 없다. 언제든 재개될 것에 대비해 현대아산이 더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해야 하므로 건설 부문을 확대하고 있다."

―현대그룹의 위기는 대북 사업 때문에 시작된 거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실제 손해가 막심하지 않은가?

"손해라기보단 부두, 숙박 시설 등 투자해 놨는데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이 터지기 3년 전부터는 흑자를 내고 있었다. 1998년 소 떼 방북 이후 200만명의 관광객이 금강산에 다녀갔고, 개성공단에 125기업이 입주해 좋은 실적을 거뒀다."

―남편이 대북 송금 관련 수사를 받다 세상을 떠났는데 왜 이 사업에 집착하나.

"이제 와 포기하면 완전 헛고생 아닌가. 대북 사업은 아버님 의지가 강했다. 북한 갔을 때 아이들을 안아보니 앙상한 뼈가 만져지더란다. 북한 주민들이 잘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수익이 핵 개발에 들어갔다는 비난도 받는다.

"2016년 개성공단이 중단됐을 때 정부도 개성공단 자금이 핵 개발에 유입된 증거는 없다고 했다. 금강산 수익도 그렇게 크지 않은 것으로 안다. 다만 골드만삭스 리포트처럼 북에는 자원과 노동력이 있고, 남쪽엔 기술이 있으니 민간 차원의 경제 교류만 되더라도 큰 결실을 맺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류가 중단된 틈을 타 중국 기업들만 이득을 보고 있다."

―네 번 독대한 김정일은 어떻던가.

"2009년 봤을 땐 건강이 안 좋아 보였다. 음식이 나올 때마다 직접 설명을 하더라. '국수에 얹은 고명은 버섯을 얇게 채 썰어서 말린 다음 볶은 거다'란 식으로. 한국 영화도 많이 보는 듯했다. 임권택 감독의 '축제'를 인상 깊게 봤고, '쉬리'는 뭐 그따위로 만들었어, 라고 하더라(웃음)."

―백두산도 현 회장 가지라고 했다던데.

"그런 말로 상대를 휘어잡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특별기를 내줘서 백두산 답사도 했다. 그런데 핵 개발 등 미국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모든 게 중단됐다."

―그렇게 위험천만한 사업을 왜 고집하나.

"다른 기업들이 단시간에 얻을 수 없는 현대만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다들 입질도 하고 관심도 가졌지만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현대라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적대적 M&A서 현대엘리베이터 지킬 것

―현정은의 20년은 경영권 방어의 역사였다. 최근엔 쉰들러와 벌인 소송에서 졌다. 쉰들러는 현대그룹이 현대상선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현대엘리베이터에 파생 상품 계약을 맺게 함으로써 거액의 손실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2006년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을 26% 사들였다. KCC 지분까지 합치면 우리 지분보다 많으니 그룹에 비상이 걸렸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파생 상품 계약을 통한 우호 지분을 확보했다. 합법적인 방식이었다."

―그런데 왜 재판부는 쉰들러의 손을 들어줬을까.

"1심은 파생 상품 계약을 정상적 경영 행위로 보고 기각시켰다. 반면 2심은 쉰들러의 경영권 욕심은 알겠으나 일부 파생 상품 계약으로 현대엘리베이터에 손해가 발생했으니 20%는 책임이 있다며 1700억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도 2심과 같은 판단을 했다."

―판결 직후 배상금을 납부했는데, 왜 여진이 계속될까.

"손해배상금을 못 내게 하고 내 주식을 강제 압류함으로써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게 쉰들러 측 의도라는 것이 재계와 법조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현대엘리베이터가 배상금을 상환받았는데도 강제 집행을 요구한 것은 적대적 M&A의 강력한 증거다."

―쉰들러가 왜 현대엘리베이터를 탐낼 거라 생각하나.

"한국에서 토종 엘리베이터 기업은 현대뿐이다. LG는 오티스로 넘어갔고, 동양도 티센쿠르프와 합병했다. 게다가 현대는 국내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한국이 전 세계 엘리베이터 신규 시장 3위라는 점도 매력이다."

―토종 기업을 지켜야 한다는 뜻인가.

"외국 엘리베이터 업체들이 우리 기업을 인수하면서 한국 시장에 진출했지만, 공장과 연구 시설은 폐쇄하고 판매 기지로만 활용한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충주에 전자동화 방식으로 공장을 지어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지역 경제를 살리고 있다."

―주주들이 피해를 입은 건 사실 아닌가?

"적대적 M&A로부터 핵심 계열사인 현대상선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게 당시 경영진의 판단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해운업의 장기 불황으로 현대상선 주가가 하락하는 바람에 회사에 손해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기업의 의사 결정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현재 시점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과정이다. 결과만으로 잘잘못을 따질 수 없다."

여자라고 왜 못 해?

―경영권 위기 때마다 이메일로 직원들 다독이며 단합을 도모했더라.

"글 쓰는 걸 좋아했다. 한때 기자가 꿈인 적도 있었다(웃음)."

―그런데 어떻게 유교적 관념 강한 현대가의 며느리가 됐나.

"아버님이 먼저 날 좋게 보셨다. 군 복무 중이던 애 아빠와 선을 보게 하고 약혼 날짜까지 당신이 잡아버리셨다(웃음)."

―시집살이는 안 했나.

"아버님은 새벽 3시에도 남편에게 전화하셨다. 또 자식들을 청운동 본가 근처에 살게 하면서 월수금, 화목토 팀으로 나눠 식사를 한 뒤 안국동 본사로 함께 걸어서 출근하셨다. 남편 말이 아버님이 어릴 때 심마니들을 많이 쫓아다녀서 다릿심이 좋다고 하더라. 대통령 출마를 안 했으면 더 오래 사셨을 거다."

―시어머니 변중석 여사는 어땠나.

"남편이 생선을 좋아한다고 날 보고 매일 시장에 가라고 하셨다. 어느 땐 새벽 4시 반에 우리 집에 오셨다. 남편이 이천으로 출근할 땐 집에서 6시 반에 나가는데 아침을 안 챙겨 먹일까 봐(웃음)."

―요즘도 현대가 사람들이 기일에 한복 입고 모이는 사진이 신문에 난다.

"자손이 많아져 이젠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더라. 아버님 계실 땐 제사에 빠지면 큰일 났는데, 안 계시니 빠지는 분들 많아졌다(웃음). 결혼 막 했을 땐 대청 안쪽에 남자들끼리 앉고 여자들은 따로 앉았다. 나중엔 아버님이 여자들도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는데 어머님이 싫어하셨다."

―친정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던데.

"어릴 때 아버지(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께 뭘 여쭤보면 엄마한테 먼저 허락받고 오라고 하셨다. 당시 외조상이란 게 생겨 아버지에게 1호로 주려고 했는데 엄마가 시댁 눈치에 못 받게 하셨다(웃음)."

―현대그룹 회장직 승계도 어머니가 적극 도왔다.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생으로 이효재 교수와 친구다. '여성이라고 왜 못 해?'란 생각을 갖고 계셨다."

―성공한 기업인이라고 생각하나.

"그냥 열심히 살아왔을 뿐이다."

―여성 기업인들에게 조언한다면.

"'무수히 맞는 잔파도가 큰 파도 이겨내는 훌륭한 선장을 만든다'는 문장을 좋아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긍정의 마음으로 이겨냈으면 좋겠다."

―정몽헌 회장이 떠난 날은 잊지 못하겠다.

"이상하게 그날은 새벽 5시에 깼는데 애 아빠가 옆에 없었다. 전날 언니네랑 외식하고 헤어진 뒤 친구 만나고 들어온다고 했는데….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 악물고 버텨낸 시간들이다."

―아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열심히는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리우신가.

"지금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다. 부부는 그저 오래오래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웃음)."

☞현정은

1955년 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과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의 4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경기여고,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페어리 디킨슨대에서 인성개발학을 공부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다섯째 아들인 정몽헌과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대북 송금 사건 수사를 받던 남편의 죽음으로 2003년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기고자 : 김윤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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