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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보리차 맛을 기억한다. 노란 주전자에 티백을 넣고 팔팔 끓여서 무가당 오렌지 주스 병에 담아 차갑게 식혀 마시면 얼마나 고소했던지.

오랜만에 보리차를 끓였다. 최진영의 소설, '홈 스위트 홈' 때문이다. 정확히는 소설 속 주인공이 늘 먹던 배달 음식 대신에 동거인과 함께 만든 요리를 하얀 그릇에 담아 천천히 먹다가 시원한 보리차를 마시면서, "물이 정말 달다"고 말하는 장면 때문이다. 달달한 물이 마시고 싶었다. 온전히 나를 위해 맛있는 물을 끓여주고 싶었다.

속이 헛헛한 날에는 '먹방'을 즐기는 사람들처럼 소설 속 '먹는 장면'에 탐닉해 본다. 혼자 조용히 만드는 파스타, 속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국물, 간소한 음식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의 짧은 독백과 별거 아닌 대화 혹은 침묵을 맛본다. 요란한 맛 표현도, 과장된 반응도 없지만, 무표정한 얼굴 위의 미세한 떨림이나 상처받은 사람이 자신에게 보내는 최선의 위로가 있다.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고 싶은 간절함도. 그러니까 내가 맛보고 싶은 것은 한 인간의 작은 진실의 맛일 것이다. 좋은 문학은 그런 맛을 낼 줄 안다.

보리차를 한 컵 가득 따라 식탁에 앉는다. 물이 천천히 식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최진영의 소설을 다시 펼친다. 사랑하는 사람과 보리차를 마시는 삶에서 소설이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불과 몇 문장 뒤에 주인공은 암 환자가 되어버린다.

완치라는 불분명한 희망보다 자신의 집을 짓고, 그 집에서 죽으리라는 구체적인 슬픔을 선택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보리차를 홀짝이며, 콧물을 훌쩍이며 읽는다. 불쌍하거나 슬퍼서가 아니다. 죽음이라는 큰 운명에 겁에 질려 오늘을 망치지 않고 보리차를 마시며 살아가는 일이 아름다워서다.

생각해 보면 내가 사랑하는 소설들은 언제나 보리차 같은 작은 최선에 대해 말했다. 당신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끓일 수 있는 보리차라니…, 얼마나 고마운가! 문학은 그렇게 작은 최선으로 삶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구한다. 기고자 : 신유진 작가·번역가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990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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