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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희의 커피하우스] 대한민국 국경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발행일 : 2023.05.26 / 여론/독자 A2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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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중인 나라의 지도자는 뭘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만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지도자도 없을 듯하다. 지난해 전쟁 발발 후 젤렌스키 대통령은 카메라 렌즈 밖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세계 각국을 다니며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수도 키이우에 돌아가서는 끊임없이 밖으로 우크라이나가 살아있다는 메시지를 발신한다.

    최근 젤렌스키 대통령은 히로시마에서 열린 G7(주요 7국) 정상회의장을 찾아 자유 진영 리더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그의 부인은 각료와 오케스트라단을 이끌고 서울에 와서 조선일보 주최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 참석했다. 키이우에서 발행하는 온라인 영자 신문의 편집장도 왔는데, 러시아의 거짓 정보에 경종을 울리는 강연을 하고 유럽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전쟁 중에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나 싶을 정도로 책임 있는 사람들이 모두 국경 밖에서 뛰고 있는 형국이다. 그 모양이 마치 위기에 처한 집안의 가장이 정보와 물자를 구하기 위해 집 밖에서 동분서주하는 모습과 닮았다.

    우리나라 이승만 전 대통령도 해방 전 미국 필라델피아 대한인총대표회의에서 자유주의 국가 건설을 주창하고, 나라 밖에서 유창한 영어 연설로 한국의 좌표를 세계에 알린 수사적 지도자였다. 6·25전쟁 시기에만 연설을 279회 했는데(김명섭·김민식 '전쟁과 연설'), 백선엽 국군 제1사단장은 군인들이 대통령의 연설로 사기가 고무돼 전쟁터에 나갈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정전협정과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고 평화와 번영의 토대가 마련된다.

    한 국가의 지도자는 여러 임무를 띠고 있지만 사실은 '국경 지킴이' 노릇이 핵심이다. 인간의 한계처럼, 국가도 끝까지 간 곳이 국경이고, 넘어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국경이다.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심지어 멕시코와 잇댄 국경에 높은 장벽을 쌓았다. 레이건 전 대통령도 일찍이 "국경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라고 일갈한 바 있다. 지난해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서 가슴 뭉클한 장면은 새 대통령이 대한민국 동서남북의 국경인 독도의 공군, 연평도의 해병대, 마라도의 해군, 강원도 GOP의 육군에서 보고받고 군 통수권을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대한민국 땅은 더도 덜도 아닌 딱 거기까지다.

    "너의 한계가 어디인지 알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그 한계를 넘어 보는 것"이라는 영국 작가 아서 클라크의 말처럼, 국경이란 본디 넘나들 때 존재감을 나타내는 법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을 오가며 기시다 총리를 만날 때 일본과의 국경이 보였고, 미국에 국빈 방문 갈 때는 미국과의 국경이 보였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히로시마에서 한국의 원폭 피해자들을 품을 때는 대한민국의 국경이 거기까지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국경을 넘나들며 한미 동맹을 복원하고, 한일 관계를 미래 지향적으로 설정하고, G7 회의에 초대받아 가치 동맹을 확인한 것은 대한민국을 자유 진영의 지도에 위치시킨 외교적 성과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동북아시아의 끄트머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자유 민주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어디가 대한민국인지, 나라의 동서남북 끝이 어디인지, 도무지 흐리멍덩하기만 했던 지난 정부와 크게 대비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윤 대통령은 지난 정부 때 치도곤을 맞은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을 대통령 직속 국방혁신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위촉했다. 북한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인물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은 북한과 잇댄 국경을 또렷하게 긋는 일이다. 북한과 경계가 생기니 넘어오는 사람도 생겼다. 이달 초 두 일가족으로 추정되는 북한 주민들이 서해 북방한계선인 NLL을 넘어 탈북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가족 단위 탈북은 2017년 7월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새 정부는 국경이 엄연한 국가를 지킨 선열들을 기리기 위해 국가보훈처를 보훈부로 승격하고 국가의 가치를 다잡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제 외국인도 받아들일 만큼 넉넉해진 마음으로 이민청도 신설하려고 한다. 대한민국 국경을 넘어온 이방인들은 우리 안에서 동화되고 적응하며 더 큰 대한민국을 일굴 것이다.

    대통령 취임 1년을 맞아 그동안의 외교적 성과가 집중 부각되자 이제부터는 그 에너지를 안으로 돌려 내치(內治)에 힘쓰라는 조언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내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국내에 대한민국의 바운더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특히 거대 의석을 지닌 제1 야당이 어디가 동맹이고 주적인지 모르는 발언을 서슴지 않을 때는 대한민국 야당이 아니라 딴 나라에서 파견 나온 출장 사무소 직원들 같다. 아무리 콩가루 집안이라도 바깥에 불량배가 있을 때는 식구끼리 위하고 감싸는 게 상례인데, 우리 야당에는 그런 최소한의 정치적 도의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 국빈 방문 가는 대통령의 뒤통수에 침을 뱉고, 일본에 가는 원전 오염수 시찰단에게 '오염수나 마시라'는 식의 조롱을 퍼붓는다. 그들의 거친 언사와 불안한 눈빛이 중국 관영 매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며 분열의 국가 이미지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 대한민국의 야당인 그들에게 대한민국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이 외국에 나갈 때마다 마치 객사라도 하기를 바라는 듯한 야당이 있다는 건, 어쩌면 대한민국이 미생(未生)이라는 방증일지 모른다. 혹은 유사 전쟁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긴장하고 국경을 사수해야 한다. 70여 년 전 전쟁 중의 한국처럼, 혹은 현재의 우크라이나처럼, 내치와 외교를 분리할 사치가 아직 대한민국에는 없어 보인다.
    기고자 :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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