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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존의 窓] 광안리에서 생선회를 처음 먹으며 한식에 눈을 떴다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前 주태국 미국 대사

    발행일 : 2023.05.25 / 여론/독자 A33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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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여러 칼럼에서 한국 음식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다룬 바 있다. 최근 해외여행 중에 한식이 왜 그토록 내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숙고해 보았다. 한국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인생 대부분을 미국과 다른 국가에서 살았는데, 도대체 한식의 어떤 매력에 이토록 깊이 빠져들었는지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마들렌 효과'를 의심했다. 7부 16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비자발적 기억에 대해 고찰한다. 그 유명한 '마들렌 에피소드'가 소개되는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을 머금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비자발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아주 오래전 기억도 익숙한 냄새, 맛, 소리, 촉감 등 여러 가지 감각에서 환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곱씹어 볼수록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의 맛이나 냄새는 어릴 적 친숙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식을 처음 맛본 것은 대학 졸업 후 신임 외교관으로 한국에 올 준비를 할 때였다. 인디애나주의 작은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나에게 김치는 경험한 적 없는 생소한 음식이었다.

    보글보글 찌개 끓는 냄새, 달궈진 석쇠에 '치익' 하고 고기를 굽는 소리, 달고 신선한 배를 한입 가득 베어 물 때의 시원함 등이 생생하게 소환해 내는 기억은 비교적 최근 경험에 대한 것이었다. 아직도 회를 먹을 때면 부산 주재 미국 영사관 직원들과 광안리 수산시장에서 첫 만찬을 하던 날이 떠오른다. 수조에서 직접 횟감을 고르자 아직 눈을 느리게 껌뻑이는 생선 대가리와 함께 곧 거창한 활어회 한 상이 차려졌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미국 중서부 내륙에서 자란 내게 생선 요리는 기껏해야 가공된 냉동 생선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거나 튀기는 수준에 불과했다. 다소 충격적일 정도로 신선한 생선을 처음 접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식과 관련된 일화는 수십 가지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1990년대에 전라남도를 처음 방문해 한우 장작 구이를 맛보며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서울의 어느 작은 식당에서 일본 외교관과 홍어를 먹던 자리에서는 특유의 지독한 냄새에 눈물이 차오르고 헛구역질을 반복하는 와중에 더는 못 먹겠다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 눈치를 보았다. 미국에서 비빔밥이 유행하는 것을 보며, 전주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는 비빔밥 한 그릇을 싹싹 비운 기억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방콕, 워싱턴 DC, 호찌민과 같은 도시에 살면서 솔직히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짧은 일정 중에 기어이 한식당을 찾아가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여행을 왔으면, 특히 대만이나 베트남처럼 현지식이 맛있기로 유명한 나라에서만큼은 가급적 현지 요리를 최대한 즐기고 경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해외에 나가면 누구보다 빨리 한식당으로 향하는 나를 깨닫게 되었다. 특히 미국을 방문할 때 이 현상이 두드러졌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고민하다가 몸에서 양질의 '연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부 차종이 옥탄가 높은 고급 휘발유를 넣도록 설계되듯, 유난히 영양 밀도가 높은 한국 식단에 익숙해진 내 몸도 이처럼 '고(高)옥탄가 연료'를 찾는 것이라는 말이다. 얼마나 과학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미국에 머물며 며칠 동안 미국 음식만 먹으면 더 쉽게 체력이 고갈된다고 느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다 한식당을 찾아내면 바로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활기가 도는 것을 느낀다.

    한식은 한국인뿐 아니라 여행지에서도 한식을 찾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안식을 선사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낯선 도시에서 온갖 감각 과부하에 시달릴 때면 가장 친숙한 음식이야말로 최고의 피난처가 되어준다. 여럿이서 여행할 때면 함께 한식을 즐기며 유대감을 형성하기에도 좋다.

    이번엔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해외여행 중에 어떤 경험을 선호하는지. 여행 내내 익숙지 않은 음식으로 모든 감각을 깨워내는 도전적 여행을 즐기는지, 아니면 지친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달래며 영양까지 보충할 수 있는 한식을 찾는지. 독자 대부분은 아마 둘째에 해당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기고자 :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前 주태국 미국 대사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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