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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344) 공화국 대한민국③ 까막눈 조선인이문화를 창조하기까지

    박종인 선임기자

    발행일 : 2023.05.24 / 여론/독자 A34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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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맹률 90%의 나라에서 문화 강국 대한민국으로

    문맹에서 문화로, 대한민국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1000년 문맹(文盲)에서 해방됐다. 금속활자와 훈민정음의 나라 백성이 비로소 글을 깨치고 이를 통해 각성(覺醒)을 했다. 미몽과 주술에서 깨어난 것이다. 각성한 대한민국은 이후 문화 강국이 됐다. 한국을 알기 위해 세계인이 한국어와 한글을 공부하는 시대가 왔다. 문화 강국 대한민국 시대다. 그 시대가 오기까지 꼭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근대 한국인 서재필과 윤치호, 미국인 호머 헐버트 그리고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다.

    첫 신문을 만든 이노우에 가쿠고로

    1882년 음력 11월 27일 오후 2시 넉 달 전 일본으로 갔던 수신사 박영효가 제물포로 귀국했다. 동행한 일본인이 일곱 명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라는 사람도 끼어 있었다.(박영효, '사화기략', 1882년 11월 27일) 한 달 뒤 박영효는 한성판윤에 임명됐다. 한성판윤 박영효가 한 첫 번째 작업은 박문국(博文局) 설립이었다. 박문국은 납 활자 인쇄기를 이용한 출판 기관이었다.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박문국 설립을 책임질 사람이었다. 그리고 조선 개화파와 교류하던 일본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 제자였다.

    1883년 음력 7월 15일 조선 정부 내에 박문국이 설립됐다. 그해 10월 1일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했다. 열흘에 한 번 발행되는 공식적인 첫 번째 근대 신문이다. 박문국 사무실은 저동(苧洞)에 있었다.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사는 서울 집이다. 인쇄기도 이 집에 있었다. 조선 첫 신문은 그렇게 일본인 집에서, 일본인 손으로 발행됐다.

    우편으로 신문을 받아본 후쿠자와가 제자에게 편지를 썼다. '조선의 가나 문자(한글)로 쉬운 이학(理學), 의학의 도리를 알리면 좋다. 아무튼 빨리 한글을 쓰게 되기 바란다.'(1883년 12월 15일 후쿠자와의 편지. 박천홍, '활자와 근대', 너머북스, 2018, p262, 재인용) 답장을 받은 이노우에는 개화파 지식인 강위(姜瑋)를 개인 교사로 모시고 언문을 연구했다. 그 결과 순한문인 한성순보에 이어 1886년 나온 주간지 '한성주보'는 '한언복합문체(漢諺複合文體)', 국한문혼용체로 발간됐다. 이후 박문국에서 출간된 서적들은 모두 국한문혼용체였다. 1894년 국한문혼용체는 갑오개혁 정부에서 왕명을 비롯한 공문서 공식 문자로 채택됐다.

    문맹률 90%의 나라와 미국인 헐버트

    외국 지식인이 마주친 조선은 문맹의 나라였다. 문맹인 원인은 달리 있지 않았다. 문자가 원인이었다. 세종이 창제한 과학적이고 쉬운 문자는 외면받고, 지식인은 고급 지식을 한문으로 습득하고 유통했다. 훈민정음은 세상을 변혁시킬 그 어떤 고급 정보도 백성에게 유통하지 못했다. 19세기 조선은 '교묘함이 서양 알파벳을 능가하는 문자의 편리함을 모르는' 문맹률 90%짜리 나라로 변해 있었다.(혼마 규스케, '조선잡기', 최혜주 역, 김영사, 2008, p19)

    1886년 조선에 온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비난과 조롱에 그치지 않았다. 입국 5년 만에 헐버트는 순한글 세계지리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출간했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훨씬 편리하지만 도리어 언문을 업신여기니 매우 안타깝다. 이에 특별히 언문으로 세계 각국 지리와 풍속을 기록하려 한다.'(헐버트, '사민필지' 서문, 1891) 그리고 그가 책임을 맡은 잡지 '코리안리포지터리'에 이렇게 썼다. '신분제와 특권 의식을 고착시키고 게으름을 낳게 하는 중국 글자를 내던지고 이 새로운 표음문자를 받아들였더라면 조선인에게는 무한한 축복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허물을 고치는 데 너무 늦었다는 법은 없다.'(헐버트, '조선 문자(Korean Alphabet), 코리안리포지터리 1896년 6월 호) 헐버트는 이 잡지에 수시로 조선어 문자와 문법에 대해 논문을 실으며 한글 보급과 이를 통한 대중의 각성을 유도했다. 이 미국인 한글학자는 "웨스트민스터사원 대신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에 묻혀 있다.

    근대 한글의 보급, 윤치호와 서재필

    1896년 1월 바로 그 '코리안리포지터리'에 'T.H.Y'라는 필자가 영문으로 이런 글을 실었다. 제목은 '쉼표 혹은 띄어쓰기(Commas or Spacing)'.

    '소설 '삼국지'에서 '장비가 말을 타고'를 '장비 가말을 타고'라고 읽는 실수를 한다. 이는 쉼표와 띄어쓰기를 도입해 단어들을 분리시키면 없앨 수 있다. 선교사들이 쓴 책은 필연적으로 단어와 숙어와 문장이 낯설다. 아무 띄우기 없이 조선어로 번역하면 조선인은 전혀 읽을 수 없다. 시험 삼아 해보라.'

    이 필자 'T.H.Y' 본명은 'Yun Tchi-Ho', 당시 조선 외부 협판(외교부 차관) 윤치호(尹致昊)다. 미국 에머리대 졸업생인 윤치호는 영문법에서 띄어쓰기를 차용해 한글에도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해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1884년 갑신정변 때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해 만든 신문이다. 서재필은 신문 체제를 명확하게 규정했다. 순한글과 띄어쓰기다. '모두 언문으로 쓰는 것은 남녀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구절을 떼어 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 '한문으로 보낸 투고는 당초에 상관 아니함(취급하지 않음)'.

    '한글을' '떼어 쓰는(띄어 쓰는)' 목적은 단순 명쾌했다. '새 지각과 새 학문이 생기리라'.(이상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호) 새로운 각성과 학문, 곧 근대를 뜻한다. 한글 근대화에 간여한 이 선각자들 없이 21세기 대한민국은 설명될 수 없다.

    까막눈으로 맞은 해방

    식민 시대도 개선은 없었다. 1930년 한글 문맹률은 84.6%였고, 일본어와 한글을 모두 못 쓰는 문맹률은 77.7%였다.(조선총독부, '조선국세조사보고'(1930). 노영택, '일제시기의 문맹률 추이', 국사관논총 51집, 국사편찬위, 1994, 재인용)

    1945년 해방 직후 미군정 조사 결과 조선 문맹률은 78%였다. 건국을 두고 우익과 좌익이 갈려 있는 사이, 군정은 각 시군에 국문 강습소를 설치하고 문맹 퇴치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1948년 미군 철수 때 문맹률은 41%까지 낮아졌다.(1959년 3월 31일 '조선일보')

    이미 1946년 2월 실질적인 단독정부인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한 북한은 "지금 싸움은 선전적 말의 싸움과 글의 싸움"(김일성, 1946년 5월 19일)이라며 맹렬하게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했다.(이주환, '1945~1949년 북한에서의 문맹퇴치운동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5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5) 북한은 1949년 3월 문맹 퇴치 완수를 선언했다.(교육부, '한국 성인 문해 교육의 발전과정과 성과', 2012, p30) 그리고 이듬해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다.

    문맹 퇴치에서 블랙핑크까지, 대서사극

    전쟁 와중인 1953년 1월 1일 대한민국 문교부가 '문맹 국민 완전 퇴치 계획'을 국무회의에 제출했다. '민주 국가의 건전한 진전을 기함에는 그 나라 국민 전체의 지적 수준 여하가 절대적인 근본 요소이다.'(문교부, 1953년 1월 1일 국무회의부의사항 '문맹국민완전퇴치계획', 국가기록원)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그해 2월 전국에 국문 강습소가 설치되고 한글 교재 84만부가 배포됐다. 퇴치 계획이 5차례 실시되는 동안 문교부, 내무부, 국방부, 농림부, 보건복지부, 공보실부터 통·반장, 다시 말해서 전(全) 대한민국 정부가 총출동해 문맹자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1958년 말, 대한민국은 공식 문맹률 4.1%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교육부, 앞 책, p36) 이름 대신 작대기 개수로 선거 입후보자를 분별했던 까막눈 조선이 마침내 눈을 뜬 것이다.

    그래서 어찌됐는가. 글을 통해 신문물을 습득한 대한민국인들이 각성을 하더니 500년 동안 묶여 있던 문화 창조력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스스로 즐기던 그 문화가 흘러넘쳐 BTS, 블랙핑크로 대변되는 한류(韓流) 문화를 생산하는 문화 강국이 된 것이다. 그 틈에 2692명이었던 1997년 제1회 한국어능력시험 지원자는 2022년 35만6665명으로 늘었다.(교육부, 국제교육원 통계) 문득 보니 500년 문자 감옥을 목격한 숱한 선각자들이 내건 목표, '대중의 각성과 신문물 습득'이 예정했던 기적 아닌가.
    기고자 : 박종인 선임기자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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