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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中, 160년 만에 블라디港 확보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발행일 : 2023.05.24 / 특집 A3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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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보스토크, 아편전쟁 중재 대가로 中이 러에 넘겼죠

    지난 15일 중국 언론은 "다음 달 1일부터 중국 동북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항(港)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고 보도했어요. 지난 3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2030년 중·러 경제협력 중점 방향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했는데요, 그 후속 조치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항 사용을 허가한 것으로 보여요. 중국은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서 생산하는 무역 화물을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바로 실어 중국 남방 지역으로 운송할 수 있게 됐습니다.

    러시아는 영토의 77%를 차지하는 시베리아 지역을 편입하는 과정에서 중국과 국경 분쟁을 겪었어요. 군사력을 앞세워 불평등 조약을 맺기도 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1858년 아이훈 조약과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가 청에서 빼앗은 지역이에요. 중국은 160여 년 만에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이용하게 되는 거랍니다.

    네르친스크 조약과 나선 정벌

    국경을 정하기 위해 러시아와 중국이 최초로 맺은 평화 조약은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입니다.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는 늘 해양 진출을 꿈꿨어요. 특히 부동항(不凍港·겨울에도 바다가 얼지 않아 1년 내내 이용할 수 있는 항구)을 얻기 위해 시베리아를 거쳐 태평양으로 진출하려고 했지요. 점점 동쪽으로 세력을 넓힌 러시아는 네르친스크를 중심으로 중국과 교역을 시작했어요. 당시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은 시베리아에서 사냥한 야생동물의 모피였죠.

    러시아는 1651년 아무르강 북쪽 알바진이란 곳에 성채를 세웠어요. 그런데 모피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주변 지역을 약탈하기도 해 원주민들과 갈등을 빚었어요. 러시아는 점점 더 따뜻한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 했죠. 하지만 구식 무기를 쓰는 청나라 군대는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에 계속 패배했어요. 이 싸움에 조선도 휘말렸답니다. 청이 조선 조총의 위력을 알고 지원군을 요청한 것이죠. 당시 조선 왕 효종은 병자호란(1636~ 1637)의 치욕을 설욕하고자 비밀리에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 일환으로 훈련한 조총 부대가 아이러니하게도 청군을 도와 러시아군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됩니다. 1654년과 1658년 두 번에 걸쳐 조선군 총 400여 명이 투입돼 러시아군을 무찔렀는데, 이를 제1·2차 나선(羅禪·러시아) 정벌이라 합니다.

    이후 청은 한족 장군 3명이 일으킨 삼번의 난(1673~1681) 때문에 동북 지역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그동안 러시아인들은 알바진에서 계속 약탈을 일삼았어요. 청 황제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한 후 러시아를 완전히 내쫓으려고 다시 군대를 파견했어요. 알바진의 성채는 견고했지만, 청의 강력한 포격으로 러시아군은 거의 궤멸 직전까지 갔어요. 러시아 정부는 급히 베이징으로 사절단을 파견해 강화 협상을 제안했어요. 청은 이를 받아들여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합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러시아와 청이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평화 조약으로, 처음으로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을 합의한 조약이에요. 국경은 스타노보이산맥과 아르군강을 따라 결정됐어요. 러시아가 알바진에서 철수하기로 했기 때문에 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을 수 있었죠.

    이후 양국 무역이 활기를 띠면서 러시아 상인이 몽골까지 왕래하게 됩니다. 그런데 러시아와 외몽골 간 국경이 확실하지 않았고 교역 관련 분쟁이 잦아지자 양국은 캬흐타 조약(1727)을 맺었어요. 국경에 대한 합의를 서쪽까지 확장한 것이죠. 양국은 몽골과 시베리아 사이 국경을 정하고 캬흐타 등 아르군강 변 도시에 교역장을 설치하기로 했어요. 러시아는 이 조약으로 바이칼호와 그 주변 지역을 획득했어요. 청은 러시아와 몽골의 연합을 방지하기 위해 캬흐타 조약을 전략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러시아는 동방 진출에 더욱 열을 올립니다. 청이 영국·프랑스를 상대로 제2차 아편 전쟁(1856~1860)을 벌일 때 기회를 포착하죠. 러시아는 몽골과 만주 국경에 군사를 집결시켜 네르친스크 조약을 뒤집는 새로운 국경 조약을 청에 강요했어요. 결국 1858년 청의 전권대사(한 국가를 대표해 다른 나라에 파견돼 외교 업무를 맡아보는 최고 직급) 이산은 아이훈에서 이 조약에 서명합니다. 아무르강 위쪽은 러시아령이 됐고, 우수리강 동쪽 연해주 지역은 두 국가가 공동 관리하기로 했어요. 이로써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항에 더욱 가까워졌지요.

    그런데 아이훈 조약은 베이징의 반대에 부딪혀 비준(조약 체결권자가 최종적으로 조약을 확인하고 동의하는 절차)이 거부됩니다. 제2차 아편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당시 청은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공격해 곤란한 상황에 놓였어요. 이때 러시아 협상가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가 나서 영·프 연합군이 철수하도록 중재했고, 청·영국·프랑스 세 나라 사이에 베이징 조약이 체결됩니다. 러시아는 중재에 대한 보상으로 아이훈 조약을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해주까지 받아냈답니다.

    삼국 간섭 후 더 남쪽으로 내려온 러시아

    청일전쟁(1894~1895)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양국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어요. 이 조약으로 일본은 만주 랴오둥반도를 영유하게 됐어요. 그러나 일본을 견제하는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이 랴오둥반도 할양(영토 일부를 다른 나라에 주는 것)에 반대합니다. 서양 열강 3국과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던 일본은 결국 랴오둥반도를 포기하는데, 이를 삼국 간섭이라고 불러요. 이후 러시아는 일본이 반환한 랴오둥반도를 조차(租借·일정한 기간 영토를 빌려 통치하는 일)하고 이에 더해 만주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면서 만주 지역까지 장악합니다.
    기고자 :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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