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검색목록 > 기사상세보기
타이틀

그리스, 포퓰리즘에 두번 속지 않았다

    조성호 기자 김나영 기자

    발행일 : 2023.05.23 / 종합 A1 면

    종이신문보기
    ▲ 종이신문보기

    중도 우파 집권당 총선 압승

    21일(현지 시각) 그리스 총선에서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55) 총리가 이끄는 우파 집권당 신민주주의당(신민당)이 예상을 깨고 압승을 거뒀다. 그리스 내무부에 따르면 이날 선거에서 신민당은 41%를 득표하며 알렉시스 치프라스(49) 전 총리가 이끄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20% 득표)을 두 배 이상 차이로 따돌렸다. 시리자는 최저임금을 즉각 14% 인상하고, 근로 시간을 주당 35시간(현재 40시간)으로 줄이고, 전 국민의 연금 수령액을 7.5% 올리는 등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 공약을 내세웠지만 외면을 받았다. 영국 가디언은 "1974년 민주화 이후 제1당과 2당의 격차가 가장 컸다"고 전했다.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 신민당은 시리자를 5~7%포인트 정도 앞서며 아슬아슬한 승부를 펼칠 것으로 예상됐다. 이런 전망을 뒤엎으며 집권당이 대승을 거둔 것은 치프라스라는 포퓰리스트가 재집권했다가는 과거와 같은 경제 위기를 다시 겪을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리스는 2010년 IMF(국제통화기금) 등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고 작년 3월에야 이를'졸업'했다. 가디언은 "다시 과거와 같은 일을 겪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유권자들의 선택을 이끌었다"고 전했다.

    다만 신민당은 이 같은 압승에도 불구하고 집권당이 되기 위한 의석 과반은 확보하지 못해 오는 7월 2일 2차 총선을 치를 전망이다. 1차 총선 후 연정(聯政)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치러지는 2차 총선은 제1당이 현재 수준의 득표만 해도 추가 의석을 최대 50석 받을 수 있어 단일 정당으로 집권할 수 있다.

    유권자들이 치프라스를 '위험 인물'로 인식하는 이유는 한때 포퓰리즘으로 나라가 거덜 났던 기억이 아직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국민이 원하면 뭐든지 다 준다"는 말로 유명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가 1981~1996년 두 차례에 걸쳐 집권하며 수렁에 빠졌다. 2008년 금융 위기를 만난 그리스는 2010년 2887억유로(약 410조원)에 달하는 구제금융을 받고서야 국가 부도를 막을 수 있었다.

    이런 위기 가운데 2015년 집권한 치프라스는 나라가 빚더미에 앉았는데도 구조 조정과 긴축을 거부했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선언하고 유권자의 환심을 얻으려고 독일·프랑스 등 채권국들을 '약탈자'라고 비난하며 편 가르기를 했다. 결국 그리스는 본전도 못 찾고 IMF 등으로부터 더 가혹한 구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반면 미초타키스 총리는 국가 체질을 바꿀 신자유주의자로서 그리스를 세계 무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감세(減稅) 정책을 펼치되 일반 시민을 향한 퍼주기식 감세가 아닌, 법인세 인하 등 친기업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의 취임 직후 그리스 법인세율은 28%에서 24%로 낮아졌고, 배당 소득세는 10%에서 5%로 줄었다. 외국인이 그리스를 거주지로 택하면 세금을 깎아주는 방식으로 해외 자본 유치에도 나섰다. 규제를 줄이고 경쟁력 있는 공기업은 민영화하는 등 시장 원리에 충실한 친기업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정책 방향이었다.

    한편으론 IMF 및 유럽중앙은행이 그리스에 강요한 긴축안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그리스는 좌파 정권과 국민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의료·연금 제도 개혁을 단행해 국민 불만이 쌓였지만 이런 정책에서 후퇴하지 않았다. 한때 무상 의료에 연금 소득 대체율은 90%에 달했던 그리스는 현재 직장인이 의료 보험료를 석 달만 안 내도 바로 보험 혜택이 끊기게 됐다. 구제금융 직전인 2009년과 비교하면 올해 최저임금은 28% 낮아져 있다. 불편하고 힘들지만, 체질 개선을 하지 않으면 한때의 위기국에서 유럽의 영원한 '낙제생'으로 남아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국민을 움직였다.

    결국 그리스의 경제성장률은 2021년 8.1%, 지난해 6.1%를 기록하며 코로나 팬데믹 이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등했다. 2017년 45.6%까지 치솟았던 은행의 부실채권 비율은 2021년 9.2%까지 줄어들었다. 2010년 이후 유럽 지역 전체의 수출액이 42% 늘어나는 동안 그리스는 90%의 성장세를 보였다. 디미트리스 말리아로풀로스 그리스 중앙은행 수석경제학자는 "지난 10년간 그리스 경제를 견인한 것은 수출이었다"라며 "최저임금 삭감, 기업 감세 등으로 그리스 기업의 경쟁력이 올라갔다"고 분석했다.

    외국인 직접 투자도 급증했다. 지난해만 50% 늘어 2002년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온라인 전용 은행인 비바월렛이 그리스 최초의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으로 성장하는 성과도 나왔다.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2010년 투기등급인 BB+로 내린 이후 한때 잠재적 디폴트(SD)까지 내려갔던 그리스의 신용등급은 현재 투자적격(BBB-) 진입을 앞두고 있다.

    서울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는 그리스인 아르테리스 드로울리아(28)씨는 "미초타키스가 이렇게 큰 격차로 1등을 해서 놀랐다"며 "해고 유연화 등 미초타키스의 정책은 때로 너무 '미국스럽다'고 느껴지지만 어쨌거나 그리스 경제는 확실히 나아지고 있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미초타키스는 이번 선거에서도 경제를 최우선에 두겠다는 공약을 앞세웠다. 30%까지 치솟았던 실업률을 11%까지 낮추고, 외국인 투자를 더 많이 유치해 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했다. 자영업자 면세, 평균 임금 인상 등 유권자를 겨냥한 공약도 없지는 않았지만, 2027년까지의 장기 정책 과제로 설정했다.

    반면 치프라스는 포퓰리즘 공약을 내걸었다. 공공 부문 임금을 인상하고 해고를 어렵게 하겠다고 밝혔고, 연금·최저임금 등은 7월부터 바로 크게 인상하겠다고 했다. 식재료에 대한 부가가치세 삭감, 에너지 부문 수익 상한제, 에너지 회사 부분 국유화에서 나아가 일부 은행 국유화까지 내걸었다. 포퓰리스트 정권의 폐해를 경험했던 그리스 유권자들은 그런 그의 공약에 넘어가지 않고, 미초타키스의 실리적 경제 정책에 표를 몰아 주었다.

    [그래픽] 중도우파 집권 후 달라진 그리스 경제
    기고자 : 조성호 기자 김나영 기자
    본문자수 : 3000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
    인쇄 라인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