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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헌 책을 꺼내며 먼 기억을 꺼냈다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발행일 : 2023.05.18 / 여론/독자 A33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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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부모님이 사준 최초의 책은 '허클베리핀의 모험'이었다. 나는 제목 그대로 모험에 빠져들었다. 나는 1980년대 초반의 흔한 어린이였고, 우리 집은 시내 외곽에 위치해 놀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동네 친구들과 매일 골목에 모여서 놀았지만, 비슷한 숨바꼭질과 비슷한 골목 축구와 비슷한 땅따먹기의 연속이었다. 동네에서 시작해서 동네에서 끝나는 놀이가 슬슬 지겨워질 무렵, 생전 처음 선물받은 '책'이라는 존재는 순식간에 나를 지구 반대편의 미시시피강으로 데려다주었다.

    이 엄청난 상상의 모험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은 오직 책을 사 모으는 계획으로 가득 찼다. 책을 사려고 책 이외의 것들을 친구들에게 팔았다. 장난감을 팔고 축구공을 팔고 자전거를 팔았다. 처음에는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는 보람으로 책을 사 모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책을 사 모으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서, 생활에 들어가는 모든 돈을 스스로 벌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 막 연극을 시작한 20대는 여유가 없었다.

    헌책방 순례를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다. 헌책방 단골이 되면서 책을 사는 기준이 달라졌다. 가진 돈의 액수에 맞춰서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긁어모았다. 책이 늘어가며 내 나이도 늘어났다. 예전보다는 좀 더 여유롭게 책을 살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인터넷 서점이 생겨나면서 조금이라도 흥미가 생기는 책은 모조리 장바구니에 넣고 주문했다. 방바닥에, 식탁에, 옷 방에, 침대 옆에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다. 쌓인 책들이 쌓인 숙제처럼 부담스러워졌다.

    고민 끝에 꼭 필요한 책만 남기고 나머지를 처분하기로 했다. 문제는 어떤 책이 꼭 필요한 책인지 나 스스로도 몰랐다는 것이다. 버릴 책을 고르려 했지만, 단 한 권도 버리지 못했다. 책을 집어드는 순간, 책에 관계된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 책은 어떤 날 어떤 마음으로 샀고, 이 책을 읽고 얼마나 울었고, 이 책은 읽고 너무 좋아서 누구누구에게 선물했고, 책 한 권이 기억 한 편이었다. 책을 버리는 것이 기억을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책은 계속 쌓여만 갔다. 집 전체를 둘러싼 책들이, 내 마음 전체를 둘러싼 기억처럼 느껴졌다. 떠올라서 좋은 기억도 있었지만, 떠올라서 힘든 기억도 있었다.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고 싶었다. 책장을 비우면 기억도 비워질 것 같았다.

    궁리 끝에 결단을 내렸다. 내 스스로 책을 처분하지 못하면 남들이 내 책을 처분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친구들을 정기적으로 초대해서 술을 마셨다. 친구들이 떠날 때 부탁을 했다. 10분의 시간을 줄 테니 갖고 싶은 책을 딱 세 권씩만 가져가라고. 친구들은 반색을 하며 책을 골랐다. 정말 좋은 책들만 챙겨갔다. OOO의 소설집이 사라지고, OOO의 시집이 사라졌다. 친구들이 떠나고 책장의 텅 빈 칸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내 많은 기억이 홀가분해질 거라고. 하지만 며칠이 지난 후, 나는 계속해서 책장의 텅 빈 칸만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빈 칸을 바라보면 사라진 책이 떠올랐고, 사라진 책을 떠올리면 사라진 기억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참지 못하고 다시 책을 주문했다. 새로운 책이 아닌, OOO의 소설집을, OOO의 시집을 주문했다. 사라진 기억을 딱 한 번만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
    기고자 :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669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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