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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민세 안재홍 선생

    유석재 기자

    발행일 : 2023.05.18 / 특집 A2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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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 합작 '신간회' 주도… 세계로 나가는 '열린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학자, 언론인이자 광복 직후 주요 정치인이었던 민세(民世) 안재홍(1891~1965) 선생의 동상이 지난 11일 그가 살던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세워졌어요. 이 동상은 신체 일부가 사라진 듯한 모습인데, 6·25 때 북한으로 납치된 민세가 역사 속에서 조금씩 잊히는 안타까움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요. 민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7년 3개월 동안 옥고

    "조선은 내 나라다. 나의 향토다. 생활의 근거지다. 문화 발전의 토대다. 세계로의 발족지(發足地·새롭게 일을 시작하는 땅)다. 함께 일어나 지켜야 하고, 싸워야 하고, 고쳐가야 하고, 이를 방해하는 어떤 자들이고 부숴 치워 버려야 할 것이다."

    민세 안재홍이 쓴 1926년 12월 5일 조선일보 사설은 그가 한평생 걸었던 길을 잘 보여줍니다. 민세는 국학(國學)을 깊이 연구했지만 국수주의에 매몰되지 않았고, 그의 호 '민세'가 의미하는 것처럼 '민족에서 세계로, 세계에서 민족으로'라는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했습니다. 일제 치하와 광복 정국에서 그는 늘 민족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어요.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고덕동에서 태어난 민세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공부하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읽고 감명받아 "나는 조선의 사마천이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해요. 이것은 그가 추구했던 국학과 역사학 연구의 시작점이 됩니다. 17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접했고, 21세에 일본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에서 공부했어요. 3·1운동 직후 청년외교단 사건으로 처음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조선일보 사설 내용 때문에 구속되는 등 일제 치하에서 아홉 차례에 걸쳐 모두 7년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조선 고유의 것' 찾으려 노력

    1924년 조선일보 주필이 된 민세는 이후 조선일보의 발행인과 부사장, 사장을 거치는 동안 조선의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서슬 퍼런 논설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조선일보에서 근무하던 동안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일이 1927년 신간회(新幹會) 운동이었죠. 좌우 합작 독립운동 단체로서 회원 수가 3만~4만명에 이르렀던 신간회에서 민세는 총무간사를 맡았습니다. 이때 민족주의 세력이 주류가 돼 좌파 일부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당시 민세의 인간적인 면모도 주목할 만합니다.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던 민세는 신문사에서 사설 한 편을 15분 만에 쓰는 초인적인 필력을 보였는데, 손님이 찾아오면 대화는 대화대로 나누며 글을 썼다고 합니다. 그의 글은 '붓만 들면 장강대하(長江大河·긴 강과 큰 강)처럼 쏟아져 나오는 경세(經世·세상을 다스림)의 대문장'이라 불렸습니다. 자신도 그다지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가난한 기자들을 집에 불러 겨울 내의를 꺼내 주기도 했다고 해요.

    군관학교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등에 연루돼 혹독한 고초를 겪은 민세는 일제 말 고향인 평택에 칩거해 '조선상고사감'을 저술하는 등 역사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조선 고유의 것'을 상고사와 다산 정약용 등으로부터 찾기 위해 노력했는데, '세계 문화를 채용하는 길에서 어떻게 조선의 것을 그 수용의 주체로서 확립할까'를 고민했습니다.

    "화합으로 진정한 민족 국가 세워야"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민세의 정치적 행보는 돋보였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1946년부터는 이른바 '중도파'로서 좌우합작 운동에 나섰습니다. 미 군정청 민정장관 자리에 올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초석을 놓기도 했습니다.

    민세는 광복 후 좌우의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며 통합을 주장했습니다. 그 바탕이 된 그의 사상이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였습니다. 좌우에 편향되지 않은 화합을 이뤄내 진정한 민족 국가를 세우자는 것이었죠. 이런 노력은 '다사리 사상'으로 알려진 민세의 정치사상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정치란 '다사리'다. 전 인민 각 계층의 '나'와 '나'를 '다 살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먼저 나라의 구성원이 단합한 뒤 외세와 협조하고 경쟁한다는 열린 민족주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를 수용하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세 연구가인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민세는 순정(純正·순수하고 올바른) 우익의 나라를 꿈꿨다"고 말합니다. 일대일 합작이 아니라, 민족주의 세력이 주류가 돼 계급 혁명의 뜻을 접은 좌파를 포용하는 구상이었다는 것이죠. 계급투쟁 노선을 반대했던 민세는 당시 한반도에서 혁명으로 타파할 자본가나 지주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치를 들어 지적했습니다.

    이 같은 민세의 노선은 좌우 정치 세력으로부터 질시와 공격 대상이 됐습니다. 1947년에는 가까스로 암살을 모면한 일도 있었죠. 그런 상황에서 욕먹을 게 뻔한 미 군정 민정장관 직을 맡은 것에 대해 정 교수는 "통일 국가 수립에 미국을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민세는 민정장관 시절 농지 개혁의 단초를 제공했고 독도에 현지 조사단을 파견해 영유권을 확고히 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소련이 점령하고 있던 북한은 유엔이 주관하는 총선에 의한 단일 정권 수립을 거부했습니다. 이때 민세는 통일 국가 수립이 사실상 어려워졌다고 보고 차선으로 대한민국 수립을 지지했습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됐으나, 한 달 뒤 일어난 6·25 전쟁으로 납북됐습니다.

    민세는 1956년 평양에서 "나는 공산주의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품어본 적이 없다"며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남을 것"이라고 발언했습니다. 1965년 세상을 뜰 때까지도 김일성의 권위에 고개를 숙이거나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고 민족주의자로 생활하는 기개를 보였다고 합니다.
    기고자 :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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