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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세 넘어 국가대표 된 아저씨들, 세계를 놀라게 하다

    강릉=이영빈 기자

    발행일 : 2023.05.12 / 스포츠 A25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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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링 동호회에서 만난 5人, 시니어 세계선수권서 이변

    한창 컬링에 빠져 있던 2014년, 천인선(55·당시 46세)씨가 농담을 던졌다. "이렇게 열심히 하다 우리 국가 대표 되는 거 아니야?" 강릉솔향클럽팀 컬링 동호회 아저씨들이 껄껄 웃었다. 그해 열린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본 컬링에 흥미를 느껴 모인 강릉 사람들이다.

    그리고 8년이 흐른 2022년 12월, 강릉 시니어 컬링 세계선수권대회에 나설 대표팀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동호회 경기장에 붙었다. 화물차 운전기사, 게스트하우스 사장, 학원 원장 등으로 일하던 50대 아저씨들 가슴이 뜨거워졌다. '한번 해볼까?' 지원자 10명 중 기량 심사를 거친 끝에 5명이 정말 태극 마크를 달았다. 강릉솔향클럽팀 신만호(53), 함영우(55), 천인선, 최종경(66)씨다. 이들과 함께 가끔 컬링을 즐겼던 허정욱(51)씨도 합류했다.

    평균 연령 56세. 이 아저씨들은 지난 1월 국가 대표팀에만 문을 여는 진천선수촌에서 합숙을 시작했다. 왼쪽 가슴에 단 태극 마크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브룸(빗자루처럼 생긴 브러시)으로 얼음 위를 쓸어내는 '스위핑' 자세부터 몇 시간씩 다시 연습해야 했다. 신만호씨는 "팔에 모세혈관이 터져서 피멍이 들었다"고 했다. 같은 부위 근육을 집중적으로 쓰는 게 컬링인데 동호회 수준과는 다른 훈련량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컬링에서 지휘자 역할을 하는 스킵(skip) 천인선씨는 훈련을 마친 밤에 해외 강호들 경기를 보며 전술 공부를 했다. 팀 내 최고령 최종경씨는 "따로 노는 몸과 마음이 야속했다"고 했다.

    시니어 선수권이라지만 그래도 국가 대표는 국가 대표. 이들은 생계를 뒤로하고 넉 달간 훈련에 매진했다. '뭐 하는 짓이냐'고 반대할 것 같던 가족들은 되레 "기왕 할 거 전부 다 바치고 와라"면서 응원했다. 최종경씨는 "손자 응원 덕분에 훈련을 견뎌냈다"고 전했다. 평창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팀 킴'이 진천을 찾아 연습 상대가 돼 줬다. '지옥 훈련'이 이어졌던 4월 중순, "대회를 앞둔 어느 날 서로 보니까 그럴듯한 자세를 하고 있더라"라고 이들은 회상했다.

    지난달 22일 드디어 대회 개막. 첫 상대는 '컬링계 전설' 존 브라운(69)이 버티는 잉글랜드였다. 잉글랜드 팀원들은 모두 국가 대표 출신. 경기도 하기 전에 주눅이 들었다. 한국은 첫 엔드에 3점을 내줬다. 신만호씨는 "덩치가 우리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으니까 기세에서 완전히 밀렸다"고 했다. 분위기를 바꾼 건 스킵 천인선씨. 1-4로 밀리던 4엔드, 불가능해 보였던 득점을 천인선씨가 성공시키면서 2점을 가져왔다. 천인선씨는 "어차피 같은 사람인데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득점에 잉글랜드는 당황했고, 그 뒤로 한국에 내리 5점을 허용하면서 무너졌다. 한국의 8대4 승리. 다들 기적이라 했다.

    그다음 라트비아와 벌인 2차전은 더 극적이었다. 1~2엔드에서 6점을 뽑아내면서 순조롭게 이기는 듯했다. 너무 흥분했다. 그 뒤 스톤이 의도했던 곳으로 가지 않으면서 내리 8점을 내줬다. 6-8로 뒤지던 9엔드를 앞두고 마음을 다잡은 덕에 1점씩 뽑아내면서 연장전에 돌입했고, 연장전에서 천인선씨가 마지막으로 던진 스톤이 적중하면서 2점을 뽑아냈다. 10대8 역전승. 2연승을 거둔 한국은 졸지에 다른 팀들 경계 대상 1호가 됐다. 한상호 대한컬링연맹 회장은 "국가 대표 출신으로 이뤄진 다른 나라 팀을 동호인이 모인 우리가 이길 거라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적은 여기까지였다. 허정욱씨가 코로나에 확진되면서 3차전부터 나서지 못했고, 4명이 5명 몫을 하기엔 체력이 달렸다. 이후 내리 5연패를 당하면서 2승5패로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허정욱씨는 "인생에 다시 안 올 기회였는데 팀원들에게 너무 미안했다"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천인선씨는 "부상자도 있었지만 정신력이 부족했다. 2연승에 도취돼 마음을 제대로 다잡지 못했다"고 했다. 신만호씨는 "앞으로 축구나 야구 대표팀 경기 보면서 절대 욕하지 않겠다"면서 웃었다.

    지난 4일 강릉컬링센터에서 만난 이 5명은 "(그 기간이) 꿈만 같았다. 이제 다시 현생(現生)으로 돌아왔구나"라고 입을 모았다. 이번에는 개최지가 강릉이라 연맹에서 특별히 이벤트성으로 모집한 팀. 다음 대회는 해외에서 열릴 예정이라 다시 이들이 나설지는 확실치 않다.

    "50대 중반이 되니까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어제 같고 그렇습디다. 컬링은 그런 무료한 삶을 바꿔준 한줄기 빛이었어요. 덕분에 태극 마크를 다는 평생 겪지 못할 경험도 해보고요. 한 가지에 몰두하면 어쨌든 뭔가는 이루는 것 같네요. 만약 다음 겨울에도 기회가 있다면 또 해보려고 합니다." 천인선씨가 브룸을 든 채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기고자 : 강릉=이영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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