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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이 만난 사람] 김지하 1주기, 소리꾼 임진택

    김윤덕 선임기자

    발행일 : 2023.05.08 / 여론/독자 A27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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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 형이 변절자? 타는 목마름으로 세상 구원할 열쇠 찾아나섰던 사람

    소리꾼 임진택(73)의 데뷔 무대는 구치소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서대문 구치소로 이송된 서울대생 임진택은 창문 밖에서 "한목!" 하고 자신의 별명을 부르는 소리에 까치발을 딛고 내다봤다. 김지하, 유인태 등 '주범'으로 몰린 이들이 법정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찌 됐습니까?" 물으니 "사형이야, 사형!" 하며 껄껄껄 웃었다. 충격을 받은 이는 임진택보다 감방장이었다. 사형선고를 받고 웃는 대학생들이라니!

    그날 밤 감방장이 느닷없이 오락회를 열었다. 소리는 못 내고 입만 벙긋대며 '저 푸른 초원 위에' 같은 유행가를 부르는 것인데, 감방장이 임진택에게도 노래를 권했다. 잡범들이 알아듣거나 말거나 김지하의 풍자시 '소리내력'을 읊조렸다. 반응이 뜨거웠다. '이 개 같은 세상'이란 대목에 특히 열광했다. 그날 임진택은 뼁끼통이라 불리는 변기통 옆에서 반대편으로 자리가 '승격'됐다.

    얼마 후 임진택은 호송차에서 김지하를 만난다. 그가 숨죽여 말했다. "한목, 나는 죽는다. 그러니 내 평생에 꼭 하려던 일을 네가 좀 해다오. 문화운동! 탈춤, 마당굿 등 우리 민중문화를 전승해 알리는 것." 이 말은 임진택으로 하여금 평생 김지하를 떠나지 못하게 한 '유언'이 됐다.

    김지하가 '두목'이니 나는 '한목'

    ―'한목'이란 별명이 김지하 때문에 생겼다던데.

    "지하 형 별명이 우리 마음을 빼앗은 '강도', 그리고 '두목'이었다. 지하 형이 두목이니 나는 한목이다, 했다(웃음)."

    ―사형을 언도받고 어떻게 웃을 수 있었을까.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을 이겼다고 여긴 게 아닐까. 그 시절 투사들에겐 목숨을 건 패기와 낭만이 있었다."

    ―김지하를 처음 본 게 언제인가.

    "대학 2학년이던 1970년 가을, 문리대 연극반에 지하 형이 왔다. 그해 5월 '오적'을 발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그가 나타나자 난리가 났다. 바바리코트 차림에 걸걸한 음성이 판소리 30년을 수련해도 갖기 어려운 목소리더라. 폐결핵 앓으며 피를 토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형은 첫날부터 날 못마땅해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지하 형이 일장연설을 하는데, 눈치없는 내가 말끝마다 탁탁 꼬리를 잡아채 좌중을 웃겼다. 핏대 난 형이 '야, 너는 누구냐' 묻길래 '외교학과 임진택입니다' 하니 '너는 곧 연극반을 떠날 놈으로 보인다. 너무 똑똑해 여기 남을 놈이 아니다' 하더라. 기분이 상해 막걸리를 잔뜩 마시고 연극반 소파에 자빠져 자고 있는데 어디선가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지하 형과 외교학과 홍세화 형이 정치와 예술, 인생을 논하고 있더라. 수준 높은 그들의 대화를 엿듣다 내 얼굴이 붉어졌다. 실없이 웃기만 하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임진택은 백년에 한 번 나올 재담꾼이라던데.

    "하루는 김민기가 너만큼 웃기는 놈을 봤다며 한번 겨뤄보라고 하더라. 당시 성균관대 다니던 고영수로, 나중에 전유성과 함께 개그계의 선두주자가 되는 친구다. 실제로 문리대 '미라보 다리'에서 만나 입담을 겨뤘는데 내가 졌다. 고영수는 사설(辭說)을 미리 준비해왔고, 나는 이야길 주고받다 즉흥으로 웃기는 스타일이니 못 당하겠더라(웃음)."

    ―그 재주를 예술로 승화해 보라고 한 이도 김지하였다고.

    "어느날 형이 불렀다. '사람 웃기는 것이 예술에선 엄청난 재주다. 문학에선 풍자로, 해학으로 나오는 것인데 왜 그걸 헤프게 쓰고 다니냐' 하더라."

    '변절자' 비난받은 그를 떠나지 않은 이유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실린 이른바 '죽음의 굿판' 칼럼으로 김지하는 진보 진영에서 변절자로 낙인찍힌다.

    "그는 변절자가 아니다. '죽음의 굿판 걷어치워라'로 알려진 칼럼의 원제는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다. 글 전체를 읽어보면 김지하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알게 된다. 그는 학생들의 저항 자체가 잘못이라고 한 게 아니라 죽음을 만류한 것이다. 다만 죽음의 굿판을 벌인 정권을 먼저 질타한 뒤 죽음을 무기로 택한 젊은이들을 나무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는 박근혜 지지 선언을 했다.

    "박정희 정권은 지하 형의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고문했다. 그런 김지하가 박근혜를 받아들인 건 국민 통합의 길을 모색하는 동시에, 생명 사상을 정치적으로 실현하는 데 여성 혹은 여성적인 것이 앞장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김지하가 박근혜의 품에 안겼다'고 조롱했지만 '박근혜까지 품에 안으려는' 행동이었다고 봐야 한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김지하가 죽도록 고생하고 출옥했을 때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한 운동세력의 좁은 품이 한탄스럽다'고 썼다. '죽음의 굿판' 글이 나오기 전 이미 운동권에서 김지하를 배척한 것인가.

    "김지하가 출소한 시기가 1980년 12월로, 5월 광주항쟁 이후였다. 그가 나왔을 때, 전두환 정권과도 치열하게 싸워주길 바라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형은 면회와 운동이 일절 금지된 6년여 독감방 생활에서 섬망증을 얻었다. 네 벽이 좁혀 들어오고 천장이 내려앉는 환시, 환청에 시달렸다. 그런 김지하에게 다시 감옥에 가라는 건 죽으란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죽음의 먹구름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다


    ―김지하의 생명 사상은 그때 싹튼 건가.

    "철창 틈으로 날아온 꽃씨가 시멘트 벽을 뚫고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생명이 진리이고 가장 존귀한 것임을 깨닫는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인간과 생명, 우주의 근원을 파고들었다. 결국 인간은 생명의 본성에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며, 정치, 경제, 군사 문제 또한 그렇게 풀어가야 한다고 믿게 됐다.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믿었다."

    ―첫 보고서가 1982년 발표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다.

    "김지하가 원주의 장일순 선생, 가톨릭농민회와 함께 토론하면서 집필한 문건을 읽어보라며 주었다. '죽음의 먹구름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다'는 첫문장부터 압도돼 '형님, 공산당선언 이후 최고의 선언문입니다' 했더니 피식 웃더라. 사실 난 공산당선언을 읽어본 적이 없다, 하하!"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문장을 패러디했다는 건가.

    "지하 형은 공산당선언의 첫문장을 일부러 가져왔다. 변증법적 세계관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뜻에서다. 그는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파생한 또 하나의 모순이라고 했다. 그 무렵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확신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생명 사상은 좌우 모두에 그저 이상적인 외침으로 들렸다.

    "생명 사상의 핵심은 사람이 곧 하늘이고, 인간과 자연과 우주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일원론적 세계관이다. 김지하는 그때 이미 전 세계적으로 괴전염병이 와서 인간 사회를 덮칠 것이라 예견했다. 생명론을 처음 듣고 '형님, 너무 앞서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30~40년 후에 이 얘길 꺼내면 따르지 말라고 해도 따를 겁니다' 했던 기억이 난다. 당면한 정치 이슈가 산적한데 한가하게 생명 타령이라니! 그런데 우리는 홍수와 폭염, 팬데믹까지 그 예언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중이다."

    광대란 지구 도는 소리도 낼 줄 알아야

    ―김지하의 서화전이 열리고 있다. 유홍준은 "글씨를 너무 잘 써서 시도 잘 지은 추사의 재능이 묻혔듯, 시를 너무 잘 지어 그림도 잘 그리는 지하의 재능이 묻혔다"고 하더라.

    "출소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형은 지필묵을 놓지 않았다. 묵란, 묵매, 달마에 이어 말년엔 수묵산수를 그렸다. 수많은 기금 마련전에 희사했고 지인들에게 나눠줬다. 그가 제일 그리고 싶었던 건 목포 고향집 뒤뜰에 피었던 모란이었다고 한다."

    ―임진택에게 준 그림도 걸려 있더라.

    "'광대란 모름지기 지구가 돌아가는 굉음을 듣고 이를 소리로 낼 줄 알아야 한다'며 그려준 그림이다(웃음)."

    ―86세대는 80년대 대학가를 휩쓴 임진택의 판소리 '똥바다'의 거름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86세대를 만나면 '얘, 거름을 먹었으면 정돈을 해야지. 너무 많이 먹어 지금 이런 것이냐?' 하고 농담을 한다. 70년대 운동은 어떤 주의, 사상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광주학살을 거친 86세대는 투철한 이념으로 무장하지 않고는 포악한 정권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믿었다. 김지하는 일본 학생운동의 적군파처럼 과격한 길로 갈까봐 우려했다. 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해 패배하면서 더더욱. 선거라는 합법 절차를 통해 군부 정권을 끝낼 수 있었는데도 서로 분열하며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무슨 민주화 투쟁이냐, 개탄하면서."

    ―조국 사태 후 많은 진보 인사들이 86세대를 비판했다. 홍세화는 그들을 '민주 건달'이라고 했다.

    "배는 엄청난 파도에 난파될 위기인데 아무도 그걸 보지 못하고 안에서만 싸웠다. 소수의 극단적 이념을 지향하는 집단들이 진보 정치의 확장을 어렵게 만든다."

    ―'빈산' '금관의 예수' 등 김지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들로 1주기 음악회를 열었다. 김지하가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나.

    "김지하는 섬망의 고통 중에도 세상을 구할 열쇠가 무엇인지 '타는 목마름으로' 찾아나섰던 사람이다. 그 열쇠가 '생명'이었다. 그런데 우린 여전히 서로 혐오하며 싸우고 있다. 김지하는 '역동적 중도'를 설파했다. 좌우를 오가다 결국 중심으로 돌아오는 추처럼 우리는 중도를 찾아 나아가야 한다."

    ☞임진택

    1950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경기고,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문리대 연극반에서 김지하를 만나 소리꾼의 길로 들어섰으며, '오적' '소리내력' '똥바다' 등 창작 판소리를 개척했다. TBC PD 시절 정권진 명창에게 '심청가'를 사사했고, 해직 후 문화운동에 전념했다. 과천세계마당극큰잔치, 전주세계소리축제 등을 기획했고, 현재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기고자 : 김윤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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