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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장진호(長津湖) 전투

    유석재 기자

    발행일 : 2023.05.04 / 특집 A2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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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올리버 스미스 미 해병대 1사단장)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7일(현지 시각) 미 의회 연설에서 "미 해병대 1사단은 장진호(長津湖) 전투에서 중공군 12만명의 인해(人海)전술을 돌파하는 기적 같은 성과를 거뒀다"고 말했어요. '인해전술'이라는 것은 우수한 무기가 아니라 많은 병력을 투입해 적을 압도하려는 전술로, 6·25전쟁(1950~1953) 당시 중공군(중국 공산군)이 실제로 썼어요. 윤 대통령 발언에 중국 외교부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은 (중국의) 위대한 승리"라고 반발했습니다. '항미원조 전쟁'이란 '중국이 미국의 침략에 맞서 조선(북한)을 도왔다'는 뜻으로, 중국이 자국 입장에서 6·25전쟁을 부르는 명칭입니다. 장진호 전투는 과연 어떤 전투였을까요?

    개마고원으로 밀려든 중공군 12만명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북쪽이 남쪽을 침범함)으로 6·25전쟁이 시작됐어요.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지만,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해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했습니다. 하지만 10월 25일 중공군이 북한 편을 들고 참전하며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죠.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중공군 침공으로 청천강으로 물러납니다. 당시 동부 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은 세 갈래 방향으로 북진하고 있었습니다. 동해안을 따라 원산을 점령하고 두만강 방향으로 진군한 국군 1군단, 부전호를 지나 압록강 유역 혜산진으로 진격한 미군 7사단, 10월 27일 원산에 상륙해 개마고원의 장진호 방향으로 진출한 미군 해병대 1사단이었죠.

    11월 19일, 미 해병대 1사단은 장진호 서북쪽 유담리까지 진군했습니다. 겨울에 대비해 장진호 남쪽 하갈우리에 사령부를 두고 활주로 공사를 하는 등 보급로를 확보하고 있을 때 중공군 12만명이 장진호 일대로 몰려들었습니다. 미 해병대를 제압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진출한 국군과 유엔군을 함께 차단하려는 속셈이었죠.

    혹한과 적군을 뚫고 110㎞ 강행군

    11월 27일, 미 해병대 1사단은 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에 포위됐습니다. 이곳 유엔군 병력은 최대 3만명으로, 중공군의 4분의 1 수준이었죠(자료에 따라 10분의 1까지 보기도 합니다). 게다가 미군에게 중공군 못지않은 큰 위험이 닥쳐왔습니다. 바로 추위입니다.

    10월이면 눈이 내리는 해발 1000~2000m 개마고원은 중강진과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입니다. 밤이면 영하 30도, 낮에도 영하 20도까지 내려가 윤활유와 대포가 얼어붙고 배터리가 방전돼 통신이 끊어질 정도였습니다. 중공군의 기습 공격에 전사자가 늘어났지만,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팔 수 없어 주검을 서너겹 쌓아 올려야 했습니다. 미군은 2차 세계대전 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이렇게 지독한 수준의 혹한기(몹시 추운 시기) 전투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장진호 일대에 고립된 미 해병대 1사단은 궤멸 위기에 놓였습니다. 하갈우리 활주로를 통해 동상 환자 등 부상병 4500명을 항공기로 후송했을 때, 미군 지휘부는 "장비를 모두 버리고 항공기로 철수하는 게 어떠냐"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올리버 스미스(1893~1977) 사단장은 "해병대 역사상 그런 불명예는 없다"고 단칼에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철수한다면 2개 대대 병력이 마지막 항공기 이륙까지 활주로에 남아야 하는데 그럴 순 없다는 뜻이었죠.

    스미스 사단장은 110㎞나 떨어진 함흥까지 사단 병력 전체가 걸어서 이동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후퇴인가'라는 종군기자의 질문에 스미스는 "아니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이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험난한 지형과 추위를 뚫고 적과 전투를 벌여가며 부대 단위와 장비를 유지하고 후퇴한다는 것은 극한의 사투와 같았습니다. 이때 미 해병대가 죽을 힘을 다해 넘었던 고개가 진흥왕 순수비로 유명한 황초령이었습니다. 중공군은 대규모 추가 병력을 투입하고 다리를 폭파하며 퇴로를 막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도 추위로 인해 적잖은 타격을 입었죠. 미군의 사격을 피해 눈 위에 엎드린 중공군 1개 중대가 그대로 얼어 죽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장진호 철수, 한반도 적화(赤化) 막았다

    12월 11일, 미 해병대 1사단은 마침내 함흥에 도착했습니다. 11월 27일부터 이날까지 보름 동안 장진호와 개마고원 일대에서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장진호 전투'라고 합니다. 이 전투만 놓고 본다면 중공군의 포위 공격에 유엔군이 일방적으로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진주만 공습 이후 최악의 패전'이라는 평가가 나왔죠.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 이것을 일방적인 승리라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피해 규모는 중공군 쪽이 훨씬 컸습니다. 유엔군 사상자가 1만7000여 명인 데 비해 중공군 사상자는 공식적으로 4만8000여 명이고, 비공식 수치는 6만명이 넘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미 해병대 1사단이 보름 동안 사투를 벌이는 동안 다른 부대가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두만강까지 진출한 국군 부대도 함흥으로 퇴각했고요. 12월 15일부터 23일까지 군인과 피란민 20만여 명은 흥남항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흥남 철수 작전'이라고 합니다.

    장진호 전투로 큰 피해를 당한 중공군 9병단이 전투 기능을 잃어 몇 개월 동안 후방에 머물게 된 것도 크게 보면 전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요소로 평가됩니다. 덕분에 서부 전선의 미 8군이 철수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 전문가 중에서는 만약 중공군 9병단이 건재했다면 1951년 1·4 후퇴 때 우리가 더 남쪽까지 밀려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장진호 전투가 중공군의 한반도 적화통일을 실패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장진호 전투를 평가할 때 '유엔군은 전술적으로는 패했지만 전략적으로 승리했다' '중공군은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기고자 :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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