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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저에게도 좋은 어른이 있었다는 걸"

    이태훈 문화부 차장

    발행일 : 2023.03.28 / 여론/독자 A3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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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는 내내 쓰라렸던 드라마 '더 글로리'의 마지막 화에서 뭉클한 장면을 만났다. 학교 폭력을 견디다 못한 어린 '동은'이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저쪽에 할머니 한 분도 물로 뛰어든다. 휘청이다 허우적대는 할머니. 동은은 제가 강물에 들어온 이유도 잊은 채 할머니를 겨우겨우 물가로 끌어낸다.

    "어우 얘, 왜 하필 니트를 입었어. 젖으면 무거울 텐데." 누구 때문에 다시 물 밖으로 나왔는데. 어이없어 화를 내는 동은에게 할머니가 말한다. "얘 근데, 물이 너무 차다. 어~ 춥다. 우리, 봄에 죽자. 봄에."

    할머니는 웃고 어린 동은은 운다. 배우들은 추웠을 테지만, 그 순간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따뜻했다. 어른이 돼 복수를 완성한 동은은 회상한다.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뭐가 됐든 누가 됐든 날 좀 도와줬다면 어땠을까.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이 있었다는 걸."

    '라떼'를 말하는 꼰대 되기는 쉽지만 어른 되기는 어렵다. '좋은 어른' 되기란 더 힘든 일인 걸 나이 들수록 깨닫는다. '존경할 만한 좋은 어른이 없다'는 탄식은 아직 어른이 아닌 이들의 몫이라는 것도. 슬픔과 고통 앞에서 우리는 설명이나 충고를 구하지 않는다. 마음을 기댈 때 미소 지어줄 친구를, 벼랑 끝에서 가까스로 붙든 그것보다 아주 조금 더 버텨 줄 울타리를 구할 뿐이다.

    소설가 한강에게는 소설가 고(故) 최인호 선생이 그런 친구이자 울타리였던 것 같다. 지난겨울 휴가, 무선 이어폰으로 소설가 한강 선집 전자책을 들으며 제주 올레길을 걸었다. 숨을 몰아쉬며 금모래 해변 위 전망대를 오르는데, 작가가 2013년 최인호 선생 별세 때 쓴 추모글이 흘러나왔다. 선생은 말년에 암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다른 작가 몇과 함께 떠난 짧은 여행에서 선생은 성대가 상해 칼칼해진 목소리로 한강에게 말했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강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네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 인생은 아름다운 거다."

    출판사 막내에게 차 심부름까지 시키던 시절이 있었다. 등단 이전에 한 출판사의 막내 편집자 한강은 아무 일 없던 어느 날, 아무 일 없이 귀한 녹차잔을 깨뜨린 뒤 어두운 구석방에 오래 웅크려 있었다. 최인호 선생은 그런 한강을 돌아봐 준 유일한 어른이었다. '힘드니?' 물어봐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강이 신춘문예에 당선됐을 땐 일부러 불러다 앉혔다. "참 어두운 이야기다. 그런데 후반부에선 이 어두운 가족이 바다로 소풍을 가는구나. 그게 나는 참 좋더라." 그런 선생은 한강이 영영 알지 못할까 봐, 떠나기 전 그게 가장 큰 걱정인 것처럼 반복했던 것이다. "나는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고. "네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한강은 추모 글 마지막에 "그 말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최근 새 영화 인터뷰로 만난 배우 천우희는 배우 한석규에게 자주 안부 전화를 건다고 했다. 힘들어하는 천우희에게 한석규는 이런 말도 했다. "너는 물 같은 사람이야. 남들이 너는 물 같아서 자꾸 돌을 던져. 그래도 잠깐 파문이 일 뿐이야. 그냥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 천우희는 "아무리 남들이 분탕질을 해도 물 자체가 맑으면 다시 맑아질 수 있다는 말, 그게 내게 너무 좋은 말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스승님!' 했다니까요, 하하."

    '더 글로리'의 할머니가 동은에게 '봄에 죽자' 한 말은 '봄을 기다려 피어나라'는 말이었다.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친구이자 울타리 같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라고, '너는 물 같은 사람이야'라고 말해 줄 수 있을까. 어느새 봄이 다시 지척이다.
    기고자 : 이태훈 문화부 차장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819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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