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검색목록 > 기사상세보기
타이틀

학폭 가해자·사기단 때려 잡는… 다크 히어로의 시대

    이태훈 기자

    발행일 : 2023.03.23 / 문화 A16 면

    종이신문보기
    ▲ 종이신문보기

    OTT·방송서 부는 '복수극' 열풍

    지난 한 주 전 세계 시청자는 한국이 만든 핏빛 학폭 복수극 '더 글로리'를 누적 1억2359만시간 시청했다. 주간 시청 시간을 기준으로 집계되는 넷플릭스 공식 톱10 차트에서 2주 연속 비영어 시리즈 세계 1위. 각종 범죄에 휘말린 억울한 피해자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복수 대행 서비스 이야기인 SBS 드라마 '모범택시2'는 최근 자체 최고 시청률 16%를 기록하며 주말 드라마 1위에 올랐다.

    불황에 잘 팔리는 건 짧은 스커트와 빨간 립스틱만이 아니다. 핏빛 가득한 '마라 맛' 복수극이 외출 대신 '안방 소비'에 끌리는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와 방송을 점령하고 있다. '복수극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는 2007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수년간은 '너는 내 운명' '아내의 유혹' 등 공중파 방송의 소위 '막장 드라마'들이 40%를 넘나드는 시청률로 신드롬을 일으켰다. 공공 요금 인상에 물가고와 경제난으로 살기 팍팍한 요즘, 과거 '불륜 복수극'의 자리엔 정의 구현의 대리 만족을 선사하는 복수 드라마들이 자리 잡았다.

    '더 글로리'로 정점을 찍은 학폭 복수극 흥행은 지난해 티빙 '돼지의 왕'부터 시작됐다. 학폭 피해자는 성인이 된 후에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해자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피의 응징을 벌인다. 이 잔혹 스릴러 이후 학폭 피해자의 사적 복수극들이 잇따라 흥행했다. 디즈니+의 '3인칭 복수'에선 '더 글로리'의 학폭 가해자 '박연진'의 아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신예은이 학폭에 시달리다 살해된 쌍둥이 오빠의 복수에 나섰다. 국내 OTT 웨이브 최고 흥행작이었던 '약한 영웅: 클래스1'에선 아이돌 겸 배우 박지훈이 왜소한 체격을 지능적 우위와 좋은 친구들의 우정으로 극복하며 무력한 학교와 사회를 대신해 복수를 실행에 옮겼다.

    사회에서 용인되는 원칙과 절차를 지키기보다 권선징악이라는 '결과'를 중시하는 '다크 히어로'형 주인공들이 억울한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서사도 최근 복수극이 공통적으로 가진 특징이다.

    지난달 종영한 '법쩐'은 법과 돈을 쥔 사람들에게 희생당한 이들이 똑같이 법과 돈으로 대적해 승리를 거두는 이야기. 연인을 죽인 진범을 쫓는 괴짜 변호사가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서서 복수를 돕는 '천원짜리 변호사', 정치인을 수사하다 살해당한 검사가 환생해 싸움을 이어가는 '어게인 마이 라이프' 같은 드라마도 현실 속 법의 보호 범위 바깥에서 벌어지는 사적 복수의 이야기를 담았다.

    OTT시리즈에 '더 글로리'가 있었다면 방송 드라마에는 '모범택시2'가 있다. 겉으론 평범한 택시 회사인 '무지개 운수'는 실은 억울한 피해자들을 대신해 원한을 풀어주는 복수 대행 서비스. 취업에 목마른 청년들을 울린 취업 사기단, 아파트 불법 청약 브로커, 사이비 교주 등 법과 제도가 허용하는 처벌이 피해자들의 상처를 달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한 악인들을 직접 겨냥한다. 법적 책임을 넘어 자신의 죄에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방식의 징벌을 받게 만든다. 학폭 가해자들이 각자 저지른 죄의 형태에 어울리는 최후를 맞았던 '더 글로리'와 묘하게 닮은 꼴이다.

    지난달 말 방송된 '모범택시2'의 4화, 돈도 잃고 동료도 잃은 다단계 사기꾼이 산속 보물을 찾겠다고 계속 땅을 파는 모습을 보며 주인공 '도기'(이제훈)는 말한다. "땅속에 숨겨진 일확천금을 찾아내는 것만이 현실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일 거예요. 현실이 절망적일수록 보물의 유혹과 욕망은 더 강렬해질 테니까."

    시청자들은 지금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명쾌한 권선징악과 속 시원한 사적 복수를 맛보기 위해 방송과 OTT 드라마를 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고자 : 이태훈 기자
    본문자수 : 1856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
    인쇄 라인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