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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美 분열 불 지피는 SVB(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정시행 뉴욕 특파원

    발행일 : 2023.03.20 / 여론/독자 A34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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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이 은행 줄도산과 금융 패닉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는 일단 잦아든 모양새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예금을 전액 보호하기로 하고, 통화 긴축 노선을 수정할 것을 시사하는 등 가능한 정책 수단을 발 빠르게 총동원한 덕이다. 그러나 SVB가 남긴 불씨는 금융·경제 분야 해프닝을 넘어 2024년 대선을 앞둔 미국에서 큰 사회 갈등으로 옮겨붙을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SVB 사태 해법이 사실상 대규모 구제금융이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납세자의 돈이 들어갈 일은 절대 없다"면서 구제금융이란 말조차 입 밖에 꺼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연방예금보험공사를 통해 건전한 은행에서 부실 은행으로 돌려막기 대출을 해주는 것이어서, 착실히 저축한 서민들 돈이 SVB 사태에 물리는 꼴이 된다.

    현재 미국에서 '구제금융'은 '도덕적 해이'나 '먹튀'의 동의어로 통하는 말이다. 오바마 정부는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은행이 망하면 국가 경제가 망한다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논리로, 부실 채권에 투자했다가 망한 민간 은행들을 천문학적 공적 자금을 퍼부어 살려놨다. 서민들이 집과 직장을 잃고 신음할 때, 되살아난 은행들은 성과급 잔치를 벌였고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드는 데 다시 집중했다. 그 결과 2011년 금융권의 탐욕과 빈부 격차에 분노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일어났다. 아직도 미국에서 대학생 학자금 빚 탕감, 부유세 신설 같은 반(反)자본주의적 아이디어가 계속 나오는 것을 월가 시위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버니 샌더스 같은 극좌 포퓰리스트, 도널드 트럼프라는 극우 포퓰리스트도 결국 월가 시위가 낳은 정치 분열의 단면"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지적한다.

    이번에 바이든 정부가 예금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한 은행들은 평범한 서민 금융과는 거리가 멀다. SVB 고객 대부분은 수십억~수백억 원을 굴리는 테크 기업이다. 기후변화와 성 소수자 의제에 앞장선 진보 은행으로도 통했다. 이어 파산한 가상 화폐 은행인 시그니처은행, 다음 타자로 거론되는 퍼스트리퍼블릭은행도 뉴욕 명품 거리와 샌프란시스코 부촌 등에 지점이 몰려있다. 이런 은행들의 도산을 막아주면 제2의 금융 위기에선 한숨 돌릴 수 있지만, 고물가와 고금리에 허덕이는 서민의 박탈감을 자극하고 이념 전쟁을 부추길 수 있다.

    미 정계는 SVB 구제금융 논란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 공화당은 "SVB 사태는 바이든의 돈 풀기 정책을 믿고 방만한 경영을 하다 연준 금리 인상의 유탄을 맞고 망한, 경제정책 실패의 표본"이라고 맹공하고, 민주당은 "트럼프 정부 때 은행 규제를 지나치게 완화한 탓"이라고 맞선다. 15년 전 금융 위기에서 비롯된 미국의 분열이란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기고자 : 정시행 뉴욕 특파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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