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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들 회복력 있다＂ 기준금리 0.5%p 올려

유동성 위기에 몰려 주가가 폭락한 유럽의 대형 투자은행 크레디스위스는 스위스 중앙은행인 스위스국립은행(SNB)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가 됐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이 촉발시킨 은행들의 위기가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확산되는 모습이다. 미국 정부의 신속한 개입으로 누그러지던 미국 지역 은행들의 연쇄 파산 우려도 유럽발(發) 악재가 터지면서 다시 경고등이 켜졌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는 15일 "SVB 파산 이후 미국 금융 시스템에 더 많은 압류와 폐쇄 사태가 닥치면서 '느리게 진행되는 재앙(slow-rolling crisis)'이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16일(현지 시각) 유럽중앙은행(ECB)은 기준금리를 기존 예상대로 0.5%포인트 인상해 연 3.5%로 결정했다. 크레디스위스 유동성 위기가 '긴급 수혈'로 한 고비 넘기면서 인플레이션 불길을 잡는 데 무게를 뒀다는 평가가 나온다. ECB는 이날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국)의 은행 부문은 튼튼한 자본과 유동성을 보유한 덕에 회복력이 있다"면서 "ECB는 필요시 어떤 경우에도 유로존 금융 시스템을 지원하기 위해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할 정책적 수단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늦출 경우 물가 대응에 허점이 생길 수 있는 데다, ECB가 크레디스위스 사태에 겁을 집어먹었다는 평가가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크레디스위스 "중앙은행서 70조 대출"

세계 5위 투자은행인 크레디스위스 주가는 15~16일(현지 시각) 이틀간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15일 은행 내부의 회계 문제로 불안한 가운데, 최대 주주인 사우디국립은행의 아마르 알쿠다이리 회장이 "추가 지원은 없다"고 선언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이날 주가가 24.2% 폭락했다. 하지만 16일 곧바로 장중 20% 넘게 반등했다. 스위스국립은행에서 최대 530억달러(약 70조3000억원)를 지원받아 유동성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대형 은행으로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은 사례가 됐다.

이날 아시아 증시는 이 같은 지원 발표에 따라 큰 충격은 받지 않았다. 코스피는 0.08% 내렸고, 코스닥은 0.1% 올랐다. 일본 닛케이평균(-0.80%)과 중국 상하이종합(-1.12%) 등은 소폭 하락했다.

◇"SVB는 '탄광 속 카나리아'"

글로벌 은행 위기 조짐까지 보이는 상황의 발단인 SVB 사태는 외형적으로는 진정 국면으로 보이지만, 거꾸로 '위기의 시작'일 수 있다는 비관론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느리게 진행되는 재앙'을 언급한 래리 핑크 블랙록 CEO는 투자자들에게 보낸 연례 서한에서 "SVB 파산은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값싼 돈에 대해 우리가 지불하는 대가"라고 했다.

그는 미 연준의 공격적 금리 인상이 결국 금융 시스템의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고 경고했다. SVB가 1차 도미노 패로 쓰러졌고, 다른 지역 은행들이 2차 도미노 패로 쓰러지며, 사모펀드나 부동산 등 비유동성 투자 자금은 3차 도미노로 쓰러질 수 있다고 했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인 브리지워터의 레이 달리오 설립자는 "SVB 파산은 위기를 미리 알려주는 '탄광 속 카나리아'와 같다"고 했다. '닥터둠' 누리엘 루비니 교수는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크레디스위스가 붕괴한다면 '리먼 모먼트(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촉발한 리먼브러더스 파산과 같은 순간)'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국제 유가 70달러 붕괴, 금값 상승

금융시장의 불안감이 커지면서 국제 유가는 큰 폭으로 떨어졌다. 15일(현지 시각) 뉴욕상업거래소에서 4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배럴당 5.2% (3.72달러) 떨어진 67.61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1년 3개월여 만에 배럴당 70달러가 붕괴됐다. 안전 자산인 금값은 상승세를 보이며 1.1% 오른 트로이온스당 1931.30달러에 장을 마감했다.

☞느린 재앙(slow-rolling crisis)

경제 위기가 한꺼번에 터지지 않고 서서히 확산한다는 뜻으로,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가 최근 금융 위기 상황을 진단하며 사용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급격한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1차로 실리콘밸리은행(SVB)이 무너지고 2차로 차입 의존도가 높은 지역 은행들이 위험해지며 3차로 사모펀드·부동산 등으로 재앙이 확산된다는 뜻이다.

[그래픽] 유럽중앙은행(ECB) 기준금리 추이 기고자 : 김성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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