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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335) 미군 항공사진에 숨어 있는 서대문형무소의 두 가지 비밀

    박종인 선임기자

    발행일 : 2023.03.08 / 여론/독자 A3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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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 16일 독립투사들은 형무소 삼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 해방은 우리가 자고 있는 때에 도둑같이 왔다.'(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일우사, 1962, p359)

    그렇다. 아무도 몰랐다. 1945년 8월 15일 당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옥음(玉音) 방송으로 태평양전쟁 항복을 선언했지만, 그 난해하고 복잡한 문장과 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에 조선 사람들은 뭔 말인지 몰랐다. 그러다 문득 사람들은 해방이 왔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35년 만에 들이닥친 해방과 독립에 대한 감격은 8월 15일 당일이 아니라 하루가 지난 8월 16일에 폭발했다. 그해 말 발간된 사진 잡지 영문판 '국제보도' 창간호는 서울역 앞에 모인 인파를 뒤늦게 싣고 이렇게 썼다. '일본이 연합군에 공식 항복한 다음 날 자유를 경축하기 위해 서울역 앞에 모인 거대한 군중'.(서울역사박물관, '2020 서울은 소설의 주인공이다 전시도록', p12)

    정체불명의 사진 한 장

    사진⑥
    은 바로 그 감격적인 해방을 만끽하는 군중을 찍은 사진이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70년의 기록, 대한민국 새로운 시작'에는 이 사진이 '광복을 맞아 마포형무소에서 출옥한 애국인사'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사진은 정체가 불명이다. 인터넷이나 여러 매체를 찾아보면 촬영 날짜가 해방 당일이나 8월 16일, 장소는 마포형무소(맞는 명칭은 '경성형무소'다), 서대문형무소 심지어 천안이라는 설명도 따라다닌다. 해방이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온 탓이다. 구체적인 정보가 어찌됐건, 이 사진은 1945년 광복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으로 때만 되면 인용되곤 한다.

    그런데, 이 사진이 언제 촬영됐고, 어디서 촬영됐고, 촬영된 저 사람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나왔다. 이 사진 정체는 이렇다.

    '1945년 8월 16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 삼거리에서 형무소 출소 독립운동가들과 군중을 찍은 사진'.

    근거는 바로 해방 24일 뒤인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서대문형무소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사진③)과 앞에 나온 '국제보도' 창간호 화보다. 이들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어이없는 괴담도 하나 튀어나온다. '사형장에 끌려가는 독립투사들이 부여잡고 통곡했다'는 서대문형무소 '통곡의 미루나무'는 알고 보니 해방 이후 심은 나무라는 사실.

    사회주의 계열이 선점했던 해방 정국

    식민 시대가 끝났다. 총독부는 국내 독립운동 세력 가운데 사회주의 계열인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권력 이양 파트너로 택했다. 재조일본인 안전 보장과 건준의 건국 작업 주도권을 맞교환한 것이다.

    8월 15일 여운형은 기존 건국동맹 조직을 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했다. 그리고 여운형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에게 정치범과 경제범 즉각 석방을 요구했다. 이들은 다음 날인 8월 16일 전격 석방됐다.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이들을 기다리던 군중은 출옥한 사상범들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석방된 정치범들은 상당수 여운형의 건준으로 흡수됐다. 그리고 진주군이 소련군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회주의 계열은 조직적으로 '소련군 환영'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서울역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진주군이 소련군이 아닌 미군임이 밝혀지면서 기세등등했던 사회주의 계열은 우익 계열과 건국을 다투는 험악한 투쟁 상황에 접어들게 된다.

    사진이 말해주는 그날 그곳

    사회주의 계열 사상범을 포함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독립지사들은 군중의 환영 속에 무악재 아래로 내려가 기념촬영을 했다.(사진⑤⑥)

    사진 속에는 세 갈래 길이 보인다. 멀리 무악재가 능선 사이 열려 있다. 사람들 왼쪽 뒤로 전차가, 뒤로 지붕 세 채가 찍혀 있다. 왼쪽 오르막에도 군중이 가득하다.

    23일 뒤인 9월 8일 미군 정찰기가 인천~서울 일대를 촬영했다. 그 가운데 한 컷에 서울 서부 지역이 찍혀 있다.(사진③) 무악재 서쪽에 서대문형무소가 보인다. 동쪽으로 작은 샛길이 형무소와 무악재를 연결해 작은 삼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두 사진을 비교해보면 이 '출옥 기념사진' 촬영 장소는 명확하다. 바로 서대문형무소 앞 샛길이 무악재로 연결되는 삼거리다. 출옥 기념사진 왼쪽 파란 동그라미 속에 지붕 세 채(파란 동그라미)와 인파 가득한 양쪽 길(사진⑤), 항공사진 속 오른쪽 빨간 사각형 부분(사진④)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장소를 분석해 밝혀낸 박물관연구소 소장 박찬희가 말했다.

    '증거가 사진 자체에 있었다. 서대문형무소 항공사진과 이 사진에 등장하는 길, 선로, 집들이 일치했다. 촬영 위치는 서대문독립공원 안쪽 현 '삼일독립선언기념탑' 부근이다.'

    '국제보도' 창간호에 실린 다른 사진(사진⑦)에는 출옥 사진(사진⑥) 속 인물과 동일 인물(추정) 세 명이 찍혀 있다. 흰 양복을 입은 사람과 한복을 입은 사람, 그리고 중절모와 안경을 쓴 사람이다(붉은 네모). 사진 설명은 이렇다. '조선 애국지사들이 다시 한번 중심가에서(once more in the metropolitan street).'(서울역사박물관, 앞 책)

    기념촬영 후 도심으로 행진하는 모습을 또 촬영했다는 뜻이다. 식민 시대 조선일보와 경성일보 사진기자였던 최희연(작고)은 "'국제보도'에 실린 화보는 8월 16일 내가 찍은 것"이라고 구술한 바가 있다.(2020년 1월 12일 뉴시스, '해방정국 3년')

    사진⑥의 파란 네모 속 인물은 '단파방송 사건' 주역인 독립유공자 성기석(1990년 작고)이다. '단파방송 사건'은 경성방송 조선인 직원들이 미국 방송을 통해 접한 이승만 육성과 일본 패전 뉴스를 전파하다가 적발된 사건이다.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아 8월 16일 출소했다.

    괴담으로 밝혀진'통곡의 미루나무'

    미군이 찍은 사진에는 지금까지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믿어왔던 드라마틱한 사실 하나가 괴담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담겨 있다. 사진①은 식민 시대 처형을 앞둔 독립투사들이 독립의 한(恨)을 담아 부둥켜안고 통곡했다는 '통곡의 미루나무'다. 형무소역사관 남서쪽에 남아 있는 사형장 모퉁이에 서 있다가 2020년 고사해 쓰러졌다. 형무소역사관은 쓰러진 통나무를 그 자리에 눕혀놨고 여러 시민단체는 이를 보존하기 위해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지난달에는 서울시장 오세훈이 나무를 찾아 묵념을 했다. 서울시는 메타버스 가상공간에 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1945년 9월 8일 항공사진을 확대해보면(사진②) 사형장 주변에 나무가 없다! 식민 시대가 아니라 해방된 이후 어느 시점에 심은 나무라는 뜻이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이 부여잡고 통곡할 나무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운영됐고 1992년에 독립공원으로 개장했다. 은폐됐던 공간에 '독립투사들의 한이 담긴 통곡의 나무'가 생겨버린 것이다.

    원래 사형장, 즉 '교죄장(絞罪場)'은 형무소 한가운데 옥사(獄舍) 사이에 있었다. 교죄장은 1922년에 현 위치로 이전되고 옛터는 연못으로 변했다.

    1945년까지 형무소에서 처형된 사람은 독립투사, 잡범 모두 포함해 493명이다.(이승윤, '1908~1945년 서대문형무소 사형집행의 실제와 성격', '서울과 역사' 108호, 서울역사편찬원, 2021) 이 가운데 국가보훈부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사람은 92명이다. 92명 가운데 1922년 이후 '통곡의 미루나무 옆 사형장'에서 처형된 독립유공자는 18명이다. '연못 교죄장'에서 처형된 독립유공자는 74명이다. 연못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자, 사진 한 장 덕분에 해방의 감격을 얻었고 괴담을 버리게 되었다.
    기고자 : 박종인 선임기자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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