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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도 유럽도 "美반도체법, 정말 너무한다"

    박순찬 기자 오로라 기자 워싱턴=김진명 특파원

    발행일 : 2023.03.08 / 종합 A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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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 "조건 주렁주렁… TSMC, 美에 공장 더 지을 이유 없어"…

    "TSMC의 미국 반도체 생산 라인이 이제 겨우 삽을 떴는데 벌써부터 조건이 주렁주렁 달린다. TSMC가 미국에 두 번째 생산 라인을 지을 이유가 없다."(대만 전 입법위원 궈정량)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미국 상무부가 반도체 보조금 신청 요건을 발표한 지 일주일이 지난 가운데 수혜 당사자인 미국 내에서뿐 아니라 대만, 유럽 등 세계 반도체 업계에서도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이 '백지수표는 없다'며 내건 조건들이 하나같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은 "바이든의 반도체 보조금 조항에 업계에선 '속 쓰림(heartburn)'을 유발한다는 반응이 나온다"고 비판했다.

    미국 내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을 위한 보조금은 총 390억달러(약 51조원)다. 미 정부는 여기에 반도체 시설 접근 허용, 예상 초과 이익 공유, 10년간 중국 투자 금지 같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미국 세금으로 외국 기업에 돈을 대는 만큼 자국 내 비판 여론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당장 미국 투자를 해야 하는 대만과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독소 조항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도 5일 "미국 반도체법이 크리스마스트리가 됐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백악관은 (반도체)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위험에 빠뜨리는 추가적인 정책 목표들을 법안에 덧붙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백악관이 너무 많은 목표를 공략하는 데 국가 안보 우선 사항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지난달 28일 미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반도체법이 산업적 사회 정책이 되고 있다"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미 행정부가 실패한 법안에 포함됐던 많은 사회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반도체 보조금을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 정부가 기업 보조금을 통해 보육, 노동, 고용 면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는 민주당의 진보적인 복지 시스템을 외국 반도체 기업들에 과도하게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미 관계를 의식해 언급을 자제하고 있는 국내 반도체 업계도 속으로는 불만이 많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미 당국이 요구할 경우 핵심 공정을 공개하는 것은 제조 기술과 노하우를 다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라며 "중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기술 유출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미국 정부가 중국에서의 신규 투자는 물론 기존 시설을 업그레이드하는 것도 규제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며 "30조원 이상을 각각 투자해 메모리 반도체 생산 절반가량을 의존해온 한국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지원법은 내년 재선(再選)을 노리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입법 성과의 하나로 꼽는 대표적인 정책이다. 이번 보조금의 대상은 사실상 대만 TSMC와 삼성전자다. 하지만 한국은 물론 대만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선 "미국은 인건비 등 반도체 생산 비용이 다른 나라보다 비싸기 때문에 보조금이 필수적인데, 너무 조건이 까다로워 도대체 투자를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헷갈린다"는 반응이 나온다. 미 정가에서도 바이든 정부가 보육, 노동, 고용 기준 등 민주당의 다양한 진보 정책을 끼워 넣은 결과라고 지적한다.

    ◇들끓는 비판 여론

    대만 전 입법위원인 궈정량과 대만 전 국가안전회의 부비서장 양융밍은 지난 1일 대만 방송의 반도체 관련 대담에서 반도체법을 작심 비판했다. 대만의 유명 언론인 천펑신은 온라인 방송에서 "미국 반도체법은 반도체를 무기로 너무 많은 정책 목표를 실현시키려다 산으로 간 법안"이라고 꼬집었다.

    대만 반도체의 대부로 통하는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도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지난달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을 인터뷰한 미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는 "작년 8월 모리스 창이 펠로시 의장을 만나 '반도체법이 순진하다'고 비판했다"고 보도했다. "TSMC가 미 보조금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돈으로 반도체 제조업을 통제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라며 "돈으로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전자 제조업에 끼어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 너무 순진한 것"이라고 직설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6일 "통상 외국인 투자에 지급하는 보조금과 다르게 일반적이지 않은 조건이 많아 기업들에 상당한 불확실성을 안겨주고 있다"며 "경영권과 영업 비밀 노출, 기술 정보 노출, 초과 이익 환수 등 기업이 가장 부담을 느끼는 부분에 우선순위를 두고 미 정부와 협상하겠다"고 했다.

    ◇기술 유출, 경영권 침해 우려

    반도체 업계에선 보조금 신청 조건에 포함된 세 가지를 독소 조항으로 꼽는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국가안보기관에 미국 내 생산 시설에 대한 접근을 허용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아직 세부 조건이 나오지 않았지만, 세계 첫 3나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양산에 성공하며 TSMC 추격에 나선 삼성전자 등 반도체 업계는 기밀 누설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둘째는 현금 흐름과 수익률, 수익성 지표 등이 포함된 재무 계획서를 제출하고 예상을 뛰어넘는 초과 수익이 날 때마다 미 정부에 반납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반도체는 글로벌 시황에 따라 실적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특성상 예상 수익을 미리 산출하기 어려운 특징이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는 수익을 바탕으로 조(兆) 단위의 막대한 투자를 단행해야 하는데, 보조금을 받으면 예상보다 높은 실적이 날 때마다 미 정부에 수익을 반납해야 해 경쟁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며 "보조금을 향후 5년간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에 사용할 수 없게 한 것도 경영권 침해 소지가 있다"고 했다.

    향후 10년간 중국 또는 관련 국가에서 반도체 생산 능력 확대를 금지하는 조항도 한국 기업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어렵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6개월만 투자가 늦어도 조 단위 손해가 나는데, 10년간 투자를 하지 말라는 것은 사실상 중국 공장을 폐쇄하라는 뜻과 마찬가지"라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미 정부와 협의에 나선 만큼 진전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 美 반도체 지원법상 지원 규모 / 美 반도체 지원법의 3대 독소조항
    기고자 : 박순찬 기자 오로라 기자 워싱턴=김진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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