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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3) 땅에 귀를 기울이면

    신수진 예술 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발행일 : 2023.03.03 / 여론/독자 A37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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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락같이 봄이 왔다. 텅 빈 하늘에 온기가 번지고, 물 올림을 갈망하는 나뭇가지에도 초록이 비친다. 꽃샘추위가 남았지만, 이제 어깨를 펴야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으로 이어지는 계절의 순환이 거스를 수 없는 변화를 만들고 있다.

    정주하(1958~ ) 작가는 작품이 이끄는 삶을 살았다. 지역에 있는 대학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처음 가지게 된 농촌과 농부, 농사일에 대한 관심은 사진 작업으로 이어졌고, 어느새 그를 온전히 그곳 사람으로 만들었다. 1200평 농사를 짓고, 마을 이장도 하고, 환경운동도 앞장서는 그의 작가적 관심과 일상의 과제들은 마치 닭과 달걀처럼 순환적 인과 관계로 하나가 되었다. '예술가 정주하'와 '생활인 정주하'는 일련의 변증적 고리 속에서 오늘도 새로운 서사를 써가고 있다.

    삼십 년 전, 생활인 정주하는 안정된 직장을 찾아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농촌 생활이 신기한 젊은이였고 농부들의 일상을 가까이 접하면서 작업적 영감을 얻게 되었다. 종일 밭일을 하는 어르신들이 허리를 숙이고 쪼그려 앉은 자세로 작물을 돌보는 모습이 낯설고 경이로운 나머지, 그분들 옆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이다.

    예술가 정주하는 호미와 낫 대신 카메라를 들고 농부들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땅, 그 땅을 기운차게 뚫고 올라오는 작물들, 그리고 그 위에서 땀 흘리는 사람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한껏 낮추어 내려놓은 카메라의 눈은 의외의 풍경을 목격하게 한다. 가까운 것은 크게, 먼 것은 작게 보도록 하는 원근법 기계인 카메라의 속성이 지루하고 고단한 시골 풍경을 웅장하고 신비롭게 바꿔 놓은 것이다. 늠름하게 솟은 생강잎과 멀리 보이는 산자락이 익숙한 듯 낯설다. 그렇게 작가는 땅의 소리를 들었다.

    예술가의 생의 서사는 작품으로 이어지고 펼쳐진다. 모두의 생에 반드시 서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분명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다. 주위를 예민하게 바라보고, 나만의 방식으로 다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어찌 일상이 한결같이 예술이길 바랄 수 있으랴마는, 살아있는 우리에겐 삶을 작품처럼 다듬어 가야 할 과제가 있다.
    기고자 : 신수진 예술 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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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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